둘째는 생일이 가장 슬픈 날이 됐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 故최희석씨는 지난해 5월 10일 입주민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다. 홀로 두 딸을 키워왔다는 최씨는 생일선물로 작은딸에게 마지막 용돈 30만 원을 남겼다. 봉투 위에는 '사랑한다'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최씨는 지난해 4월 아파트 단지 내 이중주차가 된 입주민 심모씨의 차를 밀었다는 이유로 갖은 협박과 폭언에 시달렸다. 심씨는 최씨를 '머슴', '종놈'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부르는가 하면 코뼈가 부러질 정도의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가해자 심씨는 지난해 12월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최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됐다.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남았을까. 정부는 '공동주택 경비원 근무 환경 개선 대책'을 발표하는 등 제도를 보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여전히 갑질 피해를 본 경비원들의 신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갑질 피해는 한 사람의 영혼 파괴…제2의 최희석은 없어야"
최씨의 형 광석씨는 동생이 근무했던 우이동 아파트 근처는 가지 않는다. 지나가기만 해도 '형 나 좀 살려주소'하고 말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다.
최씨가 남긴 음성 유서에는 "더는 경비가 맞고 억울한 일 당해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경비원 갑질'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그때마다 광석씨는 허망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순하디 순한 동생이 제대로 하소연도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며 광석씨는 갑질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달았다.
그는 "가정에서 안 당하고, 사회에서 안 당하던 일을 입주민에게 당하면서 사람의 영혼이 파괴되고 나약해지는 것"이라며 "정말 자식 같은 사람들에게 맞고 언어 폭행을 당하고, 이 문제가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니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가 생기면 입주자 대표하고 해결하라거나, 관리소장하고 이야기하라고 한다"며 "관리소장도 경비원이랑 똑같이 파리목숨인데,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각 가정 두 집 건너 하나에 경비원이 있다"며 "너는 을이고 내가 갑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제2, 제3의 최희석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무조건 입 닫는게 상책"…제도 개선에도 갑질 여전한 이유
개정안에 따르면, 아파트 경비원 등 노동자에 대한 괴롭힘 금지, 피해자 보호조치, 신고를 이유로 한 해고 및 불이익 금지 등의 내용이 공동주택 관리규약에 담겨야 한다.
먼저 17개 시·도지사가 지난달 5일까지 '관리규약 준칙'을 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5월까지 개별 공동주택 단지들이 자치규약인 '관리규약'을 개정할 전망이다. 관리규약을 위반했을 경우 지자체가 사실조사를 거쳐 시정명령을 하고, 따르지 않을 때 최대 1천만 원까지 과태료를 물릴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지만, 실제 '갑질'이 근절되기까지는 요원하다는 게 현장의 분위기다. 아직 제도의 실효성이 증명되지 않은 만큼, 경비원들은 피해 현장에서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인천의 한 아파트 경비원 차모(62)씨는 지난달 50대 방문객 A씨에게 약 40분간 폭언을 들었다. 고작 출입차단기를 내려놓고 몇 동 몇 호에 왔는지, 언제 나갈 건지 등을 물어봤을 뿐이었다.
A씨는 차씨에게 "X같이 생겼다", "XX놈아" 등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바닥에 침을 뱉는 것은 물론, 차 문을 발로 열어 차씨가 문에 부딪히게 만들기도 했다.
이같은 행위에도 차씨는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현장 보디캠 영상을 보면 A씨는 내내 반말을 쓰지만 차씨는 존댓말을 쓰고 있다. 차씨는 "(경비원은) 약자다. 우리가 바른 소리를 해도 역효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다.
"무조건 입을 닫는 게 상책이죠. 속이 뒤집어져도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일이 한번 터지고 나면 얼마나 머리가 아파요. 관리자도 힘들고요. 정부에서 벌금을 매긴다고 해도 있으나 마나죠. 직장을 아예 그만둘 생각이라면 항의를 해도 되는데..."
지체 장애 6급이었던 차씨는 현장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졌다.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해 아파트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던 동료 최씨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일하면서) 저도 엄청나게 시달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 들어야 하지 않을 소리를 너무 많이 들은 것 같아요."
전문가들은 제도개선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의식개선'이라고 지적했다. 최씨 사건을 지원했던 류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휴먼)는 "제도개선은 최소 조건이다"라며 "인권침해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시민의식 제고가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밝혔다.
이어 "경비 노동자들을 마치 조선시대 때 존재하는 하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도의 빈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갑질'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정하고 있는) 아파트 관리규약에 경비노동자에게 욕설이나 폭언 등 인권침해적 행동을 할 경우 공동체 내에서 제재를 할 수 있는 내용을 넣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몇동 몇호의 누가 경비 노동자에게 이런 일을 했다고 공지를 하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성북노동권익센터 이오표 센터장도 "언론 보도를 통해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은 것 같다"며 "입주민의 의식개선이 같이 따라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경비 노동자를 쉽게 보고 막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편, 66개 노동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故최희석 경비노동자 1주기 추모위원회는 이날 오후 7시 강북구청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추모문화제를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