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풀면 코로나 백신 부족 문제 풀릴까?

고소득 국가 백신 '싹쓸이'에 저소득 국가들 특허 유예 요구
"복제 백신 만들어 값싸게 대량 공급하자" 주장
인도 상황 악화에 미국도 '반대→검토'로 입장 바꿔

미국 시애틀의 백신 접종소. 연합뉴스
지금까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3250만 명 발생한 미국의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율은 44%. 같은 시기 미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4060만 명)가 발생한 아시아 지역 평균 백신 접종율은 4.3%. 미국의 1/10에 불과하다.

확진자가 4440만 명 발생한 영국은 백신 1차 접종율이 50.8%로 집계됐고, 84만 명이 확진된 이스라엘은 63%의 접종율로 집단면역까지 눈 앞에 두고 있다. 반면 458만 명이 감염된 아프리카 지역의 평균 접종율은 0.95%로 이들 나라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국가별, 지역별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율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일부 국가들이 백신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글로벌 제약사들에게 자금과 원천 기술을 지원해 백신을 개발하게 하고 그 반대 급부로 백신을 '싹쓸이'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EU 국가들이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당시 코로나19 백신의 신속 개발을 위해 '신속대작전'(operation warp speed)이라는 이름으로 모더나와 아스트라제네카, 존슨앤존슨, 노바백스 등에 180억 달러(한화 21조 6천억 원 상당)의 재정을 쏟아 부었다.

화이자는 미국의 지원을 거부했지만 함께 백신을 개발했던 독일의 바이오업체 '바이오엔텍'은 유럽투자은행과 독일 정부로부터 5억 6천만 달러(한화 6720억 원 상당)의 지원을 받았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 플랫폼인 메신저RNA 기술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개발됐다.

의료진이 백신 분주작업을 하는 모습. 황진환 기자
자본과 기술을 제공한만큼 백신 공급에서 우선권을 보장받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코로나19가 특정 국가만 접종을 잘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듀크대학교 글로벌헬스연구소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세계 국가가 구입한 백신 86억 회 분량 가운데 53%가 인구 16%에 불과한 고소득 국가에게 돌아갔다. 저소득 국가에게는 7억 7천만 회 분량이 돌아갔을 뿐이다. 연구소는 "지금 속도라면 전 세계 92개 빈국들은 2023년까지도 집단면역을 형성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고소득 국가들이 백신 싹쓸이로 집단면역을 형성하더라도 저소득 국가에서 발생한 변이 바이러스에 또다시 감염되는 '악순환'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바퀴벌레를 박멸하기 위해서는 한 집만이 아니라 아파트 전체를 소독해야 하듯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백신이 제때, 모든 나라에 더 많이 공급돼야 한다. 백신의 대량 생산을 가로 막고 있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특허권을 한시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백신 특허권은 세계무역기구(WTO)의 '트립스합의'(TRIPs합의, 무역관련지적재산권합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이지 않자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중저개발국들이 트립스합의의 일부 조항을 일시적으로 유예해 코로나19 백신 특허권을 풀고 백신을 세계 곳곳에서 대량생산하자고 제안했다. 마치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끝나면 복제약을 마음껏 만들어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글로벌 제약사들이 많은 미국과 영국,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은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혁신의 메리트가 줄어들어 오히려 백신 개발의 동력이 떨어지고, 이는 결국 백신 생산 부족을 가져올 수 있다며 반대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이동근 사무국장은 "특허 때문에 혁신이 일어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며 "특허와 백신 개발은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 백신 개발은 (특허가 있어도) 글로벌 제약사들에게 인기있는 분야가 아니다"며 "사스나 메르스 등 코로나 계열 감염병이 20년이 지나도 백신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럼에도 코로나19 백신이 신속하게 개발된 것은 특허보다는 각국 정부의 대규모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올들어 고소득 국가들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저소득 국가들의 '떼쓰기'로만 여겼던 미국 등은 최근 인도의 코로나19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백신 특허 일시 유예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주 백신 개발 제약사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한데 이어 이번주 후반부터 WTO와 특허권 유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 것.

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이처럼 입장을 바꾼 것은 인도 상황이 워낙 심각하고 전염성 높은 변이까지 출현하면서 전 세계적 유행을 다시 이어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가 중국의 인도태평양 진출을 막는 '쿼드'의 핵심 멤버라는 정치외교적인 이유도 못지 않게 작용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 인도, 일본, 호주 등 쿼드 4개국 정상들과 화상회의를 갖고 '쿼드 백신 파트너십'을 채택했다. 4개국의 협력으로 코로나19 백신 생산을 확대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백신 접종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가 더욱 길어질 경우 전 세계적 경제 피해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EU, 중국, 러시아 등 백신 개발국가만 백신을 접종할 경우 전세계 GDP는 1조 2320억 달러(한화 1478조 원 상당) 줄어들고 미국도 1270억 달러(한화 152조 4천억 원 상당)가 줄어드는 것으로 추산됐다. 반면 중간 소득 국가까지 백신을 접종하면 감소분은 각각 1530억 달러와 160억 달러로 줄어든다.

백신 특허권 일시 유예안에 대해 한국 정부는 찬반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특허권 유예 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정책위의장은 "코로나19 백신 공장까지 있는 대한민국에 백신이 왜 부족하냐"며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특허권이, 기술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건강연구소 김선 건강정책연구센터장은 백신 특허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19 백신을 생산해온 인도가 국내 상황이 악화되자 백신 수출을 중단했다"며 "전 세계 백신 공급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도 백신 회사는 '미국이 백신 원료 물질 수출을 중단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고 밝혔다"며 "해당 백신을 위탁생산하고 있는 국내 제약사의 일정에도 차질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화이자사(社)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43만 6천회 분(21만 8천명 분)이 지난 5일 국내에 들어왔다. 이날 새벽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관계자들이 UPS 화물항공기에서 백신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백신 특허만 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는 않다. 특허는 백신 제조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허 이외의 노하우와 영업비밀, 원료 물질 등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단순히 특허만 풀었다고 백신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특허를 풀더라도 복제 백신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제약사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제약사들이 이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백신 기술을 이전받는데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들어진 복제 백신이 원래 백신과 동일한 효능과 안전성을 갖추고 있는지 검증하는데도 역시 시간이 든다. 더디게 복제 백신을 만들 바에야 원래 백신을 신속하게 만드는게 더 효율적이라는 반대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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