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설은 없습니다"…장애인들이 떠나는(脫) 이유

일상화된 폭력·억압·경제적 착취 등 시설 내 고질적 문제로 지적
탈시설 장애인 "자유를 얻었다…제도로 묶어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시설 방임 있었지만, 입증 어려워…'좋은 시설'이란 없다"
학대피해 장애인 5명 중 1명, '시설 폭력' 피해자
전문가들 "'시설 중심주의' 벗어나야…주거 지원·활동지원 시간 확대"

장애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들을 착취하는 등 인권을 침해한 장애인 거주 시설들의 이름은 종종 유명세를 치른다. 시설에서 나와서 비로소 자기 위치와 목소리를 갖게 된 이들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시설 폭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자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시설이 장애인들 삶의 영역을 지역사회와 분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문제의식이 쌓여 '탈시설'은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움직임이 됐다. CBS노컷뉴스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설에서 나온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나는 왜 시설 밖으로 나왔는가"

장애인의 권익 증진을 촉구하는 활동에 참여한 김희선씨의 모습. 김희선씨 제공
"시설에서 좋았던 점이요? 없어요."

경기 남양주의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생활해온 김희선(46)씨는 지난 2017년 23년 만에 시설에서 나왔다. 19살 때 시설에 들어간 희선씨는 마흔을 넘겨 탈시설했다. 시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던 희선씨는 이제는 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뛰는 활동가다. 야학에 다니며 공부도 한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이 되겠다는 꿈도 생겼다.

"늘 저한테 문제가 있다면서 혼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여기서 죽을 바엔 나와서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탈시설을 결심했어요."

23년의 시설 생활은 일상화된 폭력, 억압, 경제적 착취 등으로 점철됐다.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예배하고 7시에 밥을 먹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실상 누워만 있는 생활이 반복됐다. 희선씨에게 지급되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시설 몫으로 돌아갔고, 부모님이 보내는 용돈도 마찬가지였다. 시설 종사자들이 여성 장애인을 상대로 성폭행을 가하는 등 폭력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인권 침해 사실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 "감히 이야기할 생각도 못 했고, 이야기해도 (문제 해결이) 이뤄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고 희선씨는 말했다. 그런 그에게 먼저 시설에서 나간 동료가 '자립'을 권유했다. "언니가 (시설에서) 나오면 공부하고 다른 활동들도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복돋아 줬다고 한다.


"자유요. 일상생활 모든 게 다 달라요."

장애인의 권익 증진을 촉구하는 활동에 참여한 김희선씨의 모습. 김희선씨 제공
'탈시설 후, 어떤 점이 가장 다른지' 묻는 기자의 질의에 희선씨가 환하게 웃었다. 희선씨는 "시설에 있을 때는 좋든 싫든 같이 지내야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혼자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게 다르다"고 했다. '정책이 마련되고 나서 탈시설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두고는 "제도로 묶어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어찌 됐든 나와서 본인이 싸우든, 다른 단체와 함께 싸우든 제도들을 마련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시설이란 없습니다"

임현주(57)씨는 발달장애인 아들 지원씨를 9년 동안 대전의 한 시설에 거주하도록 했다. (언어 의사소통이 어려운 지원씨를 대신해 모친과 구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160cm에 40kg대 초반이었던 지원씨는 시설에서 몸무게가 20kg 후반대까지 빠졌다. 임씨는 "얼굴이 해골처럼 변했다. 말을 못 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니까 (시설에서) 돌봄을 안 한 것"이라고 했다.

지원씨에게 문제행동이 보일 때마다 시설은 (정신과) 약을 먹였다고 한다. 임씨는 "아이가 계속 해롱거리며 누워있었다"며 "다리를 교정한다며 쇠로 된 고정대를 양쪽에 채웠는데, 아이 신체활동을 억압한 것"이라고 했다. 지원씨는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상태가 나빠졌고 지난해 3월 흡인성 폐렴에 걸렸다. 퇴원했지만 시설은 임씨에게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라"며 입소를 돌연 거부했다.

그 뒤 지원씨는 서울에 올라와 학대 피해 장애인 쉼터를 거쳐 지금은 장애인 자립지원주택에 산다. 임씨는 시설이 지원씨를 방임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했으나, 인권위는 학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시설의 방임을 증명하기는 녹록지 않았다. 거주인들의 건강검진을 맡은 병원에 문의하자, "시설에서 '검진 결과가 잘못됐다'며 체중을 바꿔 달라고 해 기록을 수정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9년 동안 (시설에) 있으면서 무슨 버릇이 생겼냐면, 허리를 90도로 꺾어서 땅바닥만 쳐다봐요. 그런데 탈시설하고 한 달도 안 돼서 허리를 세우더라고요. 주변도 돌아보고 소리도 찾고 얼굴도 마주 보고. 전에는 의지가 없었는데, 지금은 눈동자가 똘망똘망해요."

임씨는 '좋은 시설'이란 없다고 짚었다. 그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금액이 그 안에 머무는 장애인 개개인에게 다 쓰여야 하는데 '사업'의 확장 등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며 "장애인들 각자의 특성이 다른데, 방에다가 몰아놓고 TV 켜놓고 밥 세 끼 먹이는, 그렇게 끝나는, 자극이 전혀 없는 삶으로 방치한다"고 했다.

◇학대피해 장애인 5명 중 1명, '시설 폭력' 피해자

스마트이미지 제공
CBS노컷뉴스가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학대 피해 장애인 5명 중 1명이 시설 내 폭력의 피해자였다. 2019년 장애인 학대 사례는 945건, 장애인 거주시설 학대 사례는 222건으로 23.5%를 차지했다. 2018년에는 전체 학대 사례 889건, 거주시설 학대 195건으로 21.9%였다. 현장 관계자들은 "시설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 비율은 이보다 높을 것"이라고 짚었다.

장애인 거주시설 내 학대 행위자는 2018년(96.9%)과 2019년(93.3%) 모두 장애인 거주시설 종사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학대 유형을 보면, 2018년엔 '방임'(46.5%)이, 2019년에는 '신체적 학대'(35.9%)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에는 △신체적 학대 △경제적 착취 △정서적 학대 △방임 △성적 학대 △유기 순으로 많았으며, 2018년에는 △방임 △신체적 학대 △경제적 학대 △정서적 학대 △성적 학대 순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도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시설 내 인권 침해가 끊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민주당 최혜영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인권위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올해 3월까지 인권위에 접수된 장애인 생활시설(장애인 거주시설·정신건강증진시설) 인권침해 사건 진정은 모두 121건이다. △2018년: 32건 △2019년: 48건 △2020년: 31건 △2021년(3월 기준): 10건 등이다. 올해 3월까지 들어온 진정 10건 가운데 3건(33%)이 폭행 가혹행위(신체적 학대) 사건으로, 지난 3년(2018·2019년: 0건, 2020년: 1건)에 비해 많다.

3년여 동안 접수된 진정 가운데 폭언, 욕설 등이 33건으로 가장 많았다. △열악한 시설 환경·미흡한 보호 프로그램: 각 7건 △면회, 외출 등 외부 교통권 제한·부당한 퇴소 불허·개인정보 유출 등: 각 5건 △폭행 가혹 행위·강제 퇴소·의료조치 미흡: 각 4건 △부당한 격리 및 강박·강제노동: 각 3건 등이 뒤를 이었다. 그 외 '기타'로 분류된 진정이 30건이었다.

◇제도적 뒷받침 부족…"'시설 중심주의' 벗어나야"

스마트이미지 제공
장애인들의 '탈시설'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들의 탈시설을 지원할 제도적 뒷받침은 여전히 부족하다. 시설 내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해도 장애인을 다른 시설로 전원 조치하는 등 '시설 중심주의'에 근거한 조치들이 대부분인 게 현실이다.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진은선 팀장은 "사회적인 인식, 인권 침해의 정의를 넓히는 게 문제 제기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420대구투쟁연대 전근배 정책국장은 "(장애인을) 시설에서 시설로 전원하는 건 국가 책무 안에 포함된 반면,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오겠다고 할 때의 프로세스(처리 절차)는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온 뒤 겪는 어려움으로는 활동지원 서비스 제공 시간 부족, 거주 공간 마련의 어려움 등이 꼽혔다. 희선씨는 "밤 10시가 되면 활동지원사가 돌아가 다음 날 아침까지 혼자 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떨면서 계속 참았다"고 했다. 지자체가 체험홈, 자립지원주택 등을 지원하지만, 거주 기간이 정해져 있는 데다가 주택 물량도 부족하다. 임시 거주시설 생활이 끝난 뒤 임대 아파트를 신청해도 입주까지 상당 기간이 소요된다.

그룹홈(공동생활가정), 시설체험홈 등이 사실상 '소규모화된 시설'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장애계에 따르면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1차 계획(2013~2018년) 당시 시설체험홈에 입주한 시설 거주인 265명 가운데 126명이 퇴소했으나, 이중 절반 이상(65명)이 원 시설로 돌아갔다. 시가 1차 계획을 통해 자립을 지원한 장애인은 모두 604명으로, 시설 거주 장애인 3088명 중 20%가량에 그쳤다. 2차 계획(2018~2022년)은 장애인 800명 탈시설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구대 대학원 장애학과 조한진 교수는 "(정부·지자체가) 경증 장애인 위주로 시설 퇴소를 진행하려고 한다.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봐야 한다. '선 훈련, 후 배치'가 아니라 '선 배치, 후 지원'해야 한다"며 "주거를 지원하고 지역사회 자원들을 네트워킹해 종합적인 로드맵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장애인 거주 시설과 정신요양 시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10년 내로 폐쇄하고, 복지부 장관이 탈시설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해 12월 발의됐다.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 최혜영 의원은 "'보호'라는 명분 아래 장애인들을 사회와 분리하는 것, 선택권과 자기 결정권 없이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라며 "장애인의 탈시설화를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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