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③"마구 때리고 고문"…소녀에게 제주4·3은 '악몽'이었다 ④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⑤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계속) |
'폭도새끼'
4‧3 당시 부모를 잃은 5살 소년이 들어야 했던 말이다. 지난달 14일 서귀포시 하효동 자택에서 만난 오순명 할아버지(78)는 73년 한을 털어놨다.
◇고아로 교육대학 졸업해도…'연좌제'에 좌절
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1948년 11월 초순 서귀포시 하효동 자택에서 영문도 모른 채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이후 11월 30일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됐다. 앞서 15일 어머니도 아버지 면회를 가던 길에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주려고 음식 싸서 가는데,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가다가 총으로 쏴 죽여불언게."
보름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5살 소년은 졸지에 고아가 됐다. 외동아들이었던 오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런 오 할아버지에게는 늘 '폭도새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폭도새끼라고 집에 낙서를 하질 않나. 사춘기 때는 동네 아이랑 다퉜는데, 그 부모가 '폭도새끼 말이야. 부모 없이 사니깐 아이들이나 때린다'고 욕을 하는 거라. 부모 없는 서러움이 말도 못해."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연좌제로 발령을 안 시켜주는 거라. 그때 극단적 선택 시도도 여러 번 하고, 사회를 원망해나서."
◇생계 어려움…학업 포기한 채 머슴살이
취재진이 최근 한 달간 만난 4‧3 생존자 대부분이 오 할아버지의 경우처럼 부모를 잃은 것도 모자라 사회적 낙인까지 찍혔다.
12살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눈앞에서 어머니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던 정순희 할머니(86)는 "마을 사람덜이 폭도가족이랜. 길을 다니질 못해 나서"라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그 낙인을 지우기 위해 군인과 결혼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고아가 되면서 생계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생존 피해자 대부분이 학업도 포기한 채 머슴살이, 식모살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정신적인 고통도 상당했다.
생후 17개월에 어머니와 함께 서귀포시 성산포 터진목에 끌려갔다가 홀로 살아남은 오인권 할아버지(75)는 "부모님의 부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들었어. 물질적인 것보다도 심적인 고통이 심했어"라고 말했다.
"학교 공부도 계속 하고 싶었는데 부모를 잃은 마당에 할 수도 없었어. 누가 혼내면 부모가 없어서 혼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사춘기 때는 수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어. 그래도 죽지 않으니깐 살아야 할 몸이라고 생각했지."
◇"4‧3 학살 고아…역사 속 희생자"
총탄에 부모를 잃고 '학살 고아'가 됐던 아이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고된 삶을 살아가느라 꿈도 포기했고, '연좌제'로 죄인처럼 살았다. 4‧3은 이들의 미래마저 앗아갔다.
이어 "생존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혹은 자기가 겪었던 열 살, 열두 살 때부터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전 인생을 지배해버린다. 그들의 남은 삶은 이 상흔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