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82개 중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하던 1948년 11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도 군경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가해졌다.
가시리 마을에선 노인과 어린이, 여성 가릴것 없이 30여 명이 희생됐고 토벌대의 방화로 가옥 250여 채가 불에 탔다.
특히 가시리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은 연고를 찾아 표선리나 토산리로 이주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마을 주변과 들녘에 머물렀다.
가시리 남쪽 우구리동산 토굴과 움막에도 당시 32세 여성 김계화씨가 아들 강홍구(당시 11살)군과 함께 있었고 강원길(당시 48세)씨도 가족들과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48년 12월 21일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 토벌대에 몰살 당했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
강군섭(79)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제주 4.3평화재단과 4.3 연구소에 제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강 할아버지는 "일가족 7명이 몰살당한 가시리 마을 출신 강원길과 다른 가족인 김계화, 그녀의 아들 강홍구를 비롯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 등 모두 4구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제보했다.
정확한 발굴 지점은 가시리 2227번지 감귤 과수원 한쪽 귀퉁이다.
유해를 발굴한 일영문화유산연구원 박근태 박사는 "제보자인 강군섭 할아버지가 주장한 토굴과 움막의 학살현장에서 200~300m 떨어진 곳이 유해 발견 지점"이라며 "어떻게 이곳으로 유해가 옮겨졌는지, 머리뼈 등 일부 유해만 옮겨졌는지, 다른 가족들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군섭 할아버지가 제보한 유해는 모두 4구지만 실제로 발굴된 유해는 3구여서 추가 조사가 필요하고 정확한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도 해야 한다.
4‧3 유해 유전자 검사를 전담하고 있는 서울대 법의학교실 이숭덕 교수는 "이번에 발굴된 유해 3구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친인척들의 채혈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회에선 유해 발굴 추도제와 경과보고가 이어졌고 현장 시굴조사팀의 발굴 현황 설명도 진행됐다.
유해 유전자 감식에 대한 설명과 발굴지점을 제보한 강군섭 할아버지의 증언 설명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