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익명 (대구 지하철 화재 부상자)
이동우 (대구 지하철 화재 부상자 가족대책위 위원장)
그 사건 그 후가 궁금하다. 화요일의 코너 AS뉴스. 오늘은 18년 전인 2003년으로 돌아가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시 뉴스로 함께하시죠.
● KBS 뉴스 (2003년 2월 18일 당시)> “어처구니없는 대형참사입니다. 오늘 밤 9시 뉴스는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를 집중적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이렌소리) 시커먼 연기가 대구 시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환풍구와 역사 입구마다 계속해서 연기가 솟구칩니다.”
“불길과 함께 검은 유독가스가 전동차를 가득 메웠지만 출입문이 닫히는 바람에 승객 수십 명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변을 당했습니다.”
“시신들은 불에 심하게 훼손돼 형체를 분간하기 어렵지만 많게는 100구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003년 2월 18일 일어난 대형 참사. 아마 생생하게 기억을 하실 거예요. 그 당시 사망자만 192명, 부상자 151명. 총 343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습니다. 지하철 역사 안을 가득 메우고 환풍구마다 솟구쳐오르던 그 연기. 까맣게 탄 지하철 내부, 탈출하는 사람들. 또 사망자 확인하고 오열하는 유가족들. 정말 온 국민이 그 당시에 지하철 트라우마를 겪었을 정도로 엄청난 참사였는데요.
그런데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 당시에 생존자들이 아직도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려 18년 지났는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인지 오늘 AS뉴스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그 후를 추적해 보죠. 먼저 저희 뉴스쇼의 박선형PD가 당시에 생존한 피해자 한 분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들어보시죠.
□ 제작진> 2003년 2월 18일 당시에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가시던 중이었어요?
□ 제작진> 종이로 코와 입을 막으라고?
■ 피해 생존자> 붙이라고, 이렇게 붙이면 기침을 덜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내가 사탕을, 목캔디를 가지고 다니니까 하나씩 줬지.
□ 제작진> 사탕을? 사람들한테.
■ 피해 생존자> 사탕을 하나씩 주고 사탕이 한 개 남았을 때 내가 한 개를 까서 딱 넣는 순간에 문이 찰카닥 열리는데.
□ 제작진> 열린 문으로.
■ 피해 생존자> 바로 나왔지. 나오는데 숨을 못 쉬는 거라. “억” 이렇게 되는 거라. 연기가 벌써, 불연기가 그 지하철에 꽉 차버렸어, 벌써. 앞도 안 보이고. 숨도 못 쉬고 앞이 안 보이는데 살 길이 없지. 그래도 선물 보따리를 내가 들고 있었어요. 그걸 들면서 길을 찾았죠. 왜냐하면 주변에 받치는 데가 많잖아. 내가 더듬더듬 하면서 계단을 찾기 시작한 거라.
□ 제작진> 사람들은 어땠어요?
■ 피해 생존자> 아예 뒤에 돌아볼 겨를이 없어요. 왜냐하면 앞이 캄캄한데 뒤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노, 내 순간이 바쁜데, 그렇지? 벌써 “억”하고 (정신이) 가버리는데 어떻게. 길 모르고 앞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그래서 한참 헤맸는데 계단이 내 손에 딱 걸리더라고. 얼마나 헤맸던지 보니까 안경도 없어지고 신발 뒤축도 다 도망가버리고 없었다니까.
□ 제작진> 그만큼 정신이 없으셨던 거죠?
■ 피해 생존자> 네.
□ 제작진> 그게 한 몇 분 정도인 것 같아요? 그렇게 빠져나왔던 시간이?
■ 피해 생존자> 빠져나오는 것이 시간으로만 따지면 죽었을 거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한 40분 걸렸으니까. 왜냐하면 내가 그 시간을 왜 아느냐 하면 불이 났을 때 집에 전화를 했거든. 남편한테 “여기 전철에 불이 났는데 문이 잠겼습니다” 하는데 전화가 끊겼어요. 그러니까 다른 말은 뭐. 만약에 죽었다면 유언될 말이 아무것도 없죠. 불났다 하는 것밖에 없죠.
□ 제작진> 그 뒤에 병원치료는 잘 받으셨어요?
■ 피해 생존자> 근 1년을 병원에 있었고. 18년 동안 늘 병원에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그랬지. 폐활량도 안 좋고 간도 안 좋고. 왜냐하면 약을 독한 것을 계속 먹으니까. 목으로 말을 못 했으니까.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수술해서 말을 조금 할 수 있도록.
□ 제작진> 어떤 병 때문에 말을 못 하신 거예요. 병 이름, 진단명이 뭐였어요?
■ 피해 생존자> 목이 녹은거죠. 이게 불이 들어가서. 그 연기가 불이거든. 뜨거운 불씨 나쁜 게 목 안으로 다 들어가버렸으니까. 호흡기가 완전히 망가졌지. 녹아버렸지.
□ 제작진> 목소리도 그러면 예전과 달리 사고를 기점으로.
■ 피해 생존자> 아이고, 예전의 목소리하고는 지금 목소리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지금은 그릇 깨진 소리 같잖아요, 말하자면요 그렇죠? 목이 완전히 그랬다고. 다 변했지, 소리 자체가.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잖아요. 굉장히 음성이 맑은 소리였거든요. 매일 가래가 올라와서 제가 굉장히 애를 먹어요. 왜냐하면 말하다가도 가래가 올라오기 때문에 뱉어야 되고. 고통이 오지. 기침하고 나면 배가 창자부터 끓어 올라오잖아요. 기침을 하고 가래를 뽑으려면 “악” 해야 되는데 아침마다 일어나서 그거를 뽑아내거든요. 가래가 콧구멍으로, 목 안으로 꽉 찼단 말이예요. 이게 그냥 뽑아내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졸졸졸 가래가 또 올라와요. 의사가 하는 말이, 어쩝니까. 이제 평생 갖고 가는 병입니다. 이러거든요. 그리고 의사도 약이 없다는 거지, 말하자면.
□ 제작진> 20년 동안 가장 힘들었을 때, 지나고 보니까 어떤 기억이 가장 많이 나세요?
■ 피해 생존자> 글쎄. 저는 아까도 말했지만 힘든 일이야 순간순간이 많죠. 정상적인 몸이 아니니까, 그렇죠? 굉장히 활발하게 일하던 사람인데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한복 주단을 했거든. 한복 주단을 한 50년 동안 했는데, 그런 가는 길도 이제 방향도 바뀌어졌고. 가정이 전부 다 마비 상태가 오잖아. 그러니까 모든 면에도 다 힘들고 (남편도) 또 본인 자신도 마음이 약하니까 놀라서 그 뒤에 또 암이 오고 뭐 난리가 났어. 가정이 그게 파괴돼버렸잖아요.
◇ 김현정> 2003년, 그러니까 무려 18년 전입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그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신 분이에요. 탈출하신 분이에요. 워낙 돌아가신 분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은 생존하신 것만으로도 이분들은 다행이다 하고 우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려 18년 동안 여전히 그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 받는 분이 지금 100여 명이 넘는다고 그럽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부상자 대책위라는 게 있네요. 이동우 위원장 연결을 해 보죠. 이동우 위원장님 나와 계세요.
◆ 이동우> 네, 안녕하세요.
◆ 이동우> 지금 조금 전에 우리 피해자 같은 분은 좀 그 당시에 그나마 그래도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또 종교를 믿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다소 좀 완쾌되셨는데 그것보다 더 지금 심각한 분들이 약 한 30여 명이 아주 심각합니다.
◇ 김현정> 아주 심각하다면 어느 정도인가요?
◆ 이동우> 지금 사실 12명의 사망하신 분들은 거의 사고 이후에 가족들한테 가보지 못하고 병원에서 거의 다 돌아가셨거든요. 그거는 가족들 고통뿐만 아니라 자기 고통도 병원에서 느끼고 돌아가신 분들이고 그다음에 이제 30여 명 심각하다는 것은 암이라든지 후두암. 음성 언어장애 후두암이거든요. 안에 목소리, 쉰 목소리. 아까 말했던 불 연기, 화기가 들어가면서 음성장애를 일으켜서 그 음성을 그대로 놔둬서 안에 염증이 생긴 것을 그대로 방치하다 보니까 암의 종류가 발견이 돼서 그런 후두암으로 발견된 분들이 약 한 10여 명이 있고요. 그다음에 폐암 그다음에 위암 또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적, 뇌병증. 다소 다른 질병들로 인해서 20여 명이 그렇게 같이 지금 형성되어가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 김현정> 그 당시에 생존자들에 대한 피해 전수조사도 없었다는 게 사실이에요?
◆ 이동우> 피해 전수조사라는 것은 그 당시에 제가 요구를 했죠. 정부에다가 국가 예산으로, 부상자들에 대한 지금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힐 수 없다고 전문가들이 이야기를 하니까 코드 작업을 하자. 영구적으로 부상자를 관리하는 코드 작업을 해서 이것을 하자고 했더니만 정부 예산을 경북대학 연구기관에 맡겨서 채혈을 했습니다. 피를 빼서 쉽게 말하자면 포항 경북대 연구실에 줬는데 그게 무용지물이 됐죠.
◇ 김현정> 왜요?
◆ 이동우> 그 이후에 연구 보고서가 나왔는데 보면 아무도 그게 어떻다 하는 걸 밝히지도 못하고 그대로 유야무야 돼버렸고요.
◇ 김현정> 그 후로는 그러니까 추적조사 같은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 이동우> 없었죠.
◇ 김현정> 그러면 그 당시에는 치료는 충분히들 잘 받으셨어요? 정신적인치료, 육체적인 치료?
◆ 이동우> 그 당시에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는 대통령님이 오신다, 장관들 온다, 총리 오신다고 하니까 대다수 치료를 원만하게 받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는 조기 수습하는 차원에서 일찍이 좀 정상 환자들을 퇴원을 시켰다가 제가 봐서 도저히 판단이 안 되기 때문에 재입원을 시키고 하는 이런 부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 전수조사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요. 우리가 전수조사를 하면 빨리 조기 수습하려고 대구시의 의도에 의해서 의사분들의 진단에 의해서 소견서에 의해서. 소견서로만 근거를 해서 배상 보상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게 끝이었죠.
◇ 김현정> 화상을 입었거나 다리를 다쳤거나 이런 분들은 그래도 그나마 치료를 받았는데.
◆ 이동우> 그렇죠.
◇ 김현정> 정신적인 부분. 그러니까 트라우마라는 게 지금은 어떤 건지 다 알고 있지만 2003년도만 해도 트라우마, 정신적인 치료 이런 게 굉장히 인식이 약할 때여서 그런 거는 이게 다뤄지지도 않았다면서요?
◆ 이동우> 아예 없었죠.
◇ 김현정> 아예 없었어요?
◆ 이동우> 아예 없었는 게 왜 그러냐면 저도 그 이후에 부상자를 받고 보니까 심리적 불안감, 다시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다음 치고 어쨌든 심리적으로 안정을 시켜야 되겠다 해서 1년 전에 9. 11테러가 발생됩니다. 거기에 자료를 보니까 9. 11테러에 심리적 지원을 받아서 부상자들이 빠른 회복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제가 위기상담센터를 제안을 합니다. 부상자를 관리하는 위기상담 제안을 해서 정부 차원에서까지도 좋다고 하는 과정이었거든요.
◇ 김현정> 좋다고 했는데?
◆ 이동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어떻게 됐냐면 지금 적십자사에 가 있는 심리지원센터라는 게 있습니다. 시도 16개 지원 적십자사를 통해서. 처음에는 소방방재청에서 관리했습니다. 하다가 그렇게 제가 그걸 제안해서 그렇게 갔지만 부상자들한테는 숨기고, 제가 안 것은 2014년도에 알았단 말이에요. 2014년도에.
◇ 김현정> 차려져 있었는데 그게 홍보가 안 됐다고요?
◆ 이동우> 네.
◇ 김현정> 굳이 차려놨는데 홍보를 일부러 안 할 이유는 없잖아요?
◆ 이동우> 그것도 어떻게 돼서 그렇게 대구시가 했는지도 지금도 저희들은 생각하기 어렵고.
◇ 김현정> 이해가 안 가네요. 트라우마 센터를 만들어놨는데 홍보를 안 해서 거기를 찾지를 못했다? 아무도 치료를 안 받았다?
◆ 이동우> 그래서 거기 센터장 하셨던 분에게, 4년 후에 알고 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우리한테 안 알려줬느냐 하니까 공손히 사과를 하고 잘못됐다, 몰랐다.
◇ 김현정> 잘못됐다? 그러면 일단 예산 아끼려면, 아니면 보여주기식으로 했다는 거예요?
◇ 김현정> 2019년이 돼서야 대구시 조례로 이분들에 대한 지원대책이 마련이 됐는데. 아예 뭐 가정이 이미 파탄 난 분들도 계시다면서요. 이게 어떻게 지하철 참사가 가정파탄까지 이어집니까?
◆ 이동우> 가정 파탄은, 100%라고 그러면 거짓말이고 한 60%는 지금도 가정 파탄이 전부 거의 다 가정 파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김현정> 어떻게 그렇게들 되셨어요.
◆ 이동우> 부자지간, 부녀지간도 갈라져 있고.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젊은 친구들이 그 당시에는 학원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 학원에 나가다가 지하철 탄 분이 많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래도 대학을 가보겠다,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집중력이다, 기억력이다 이런 게 다 망가져버리니까 직장을 못 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모님들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죠.
◇ 김현정> 그러면서.
◆ 이동우> 그러면 부모님들은 또 본인은 아이를 치료해줘야 하는데, 나 때문에 그렇게 가정이 망가지는데 내가 뭔가를 해야 되는데 하니까 두문불출하는 겁니다.
◇ 김현정>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 이동우> 그러니까 그 가정은 그 상태로 파탄이 나고 또 부모님들이 아픈 경우엔 부모가 아프니까 가정 파탄이 나고. 또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들은 자기가 나가서 벌어야 먹고 사는 서민들이니까. 못 나가니까 아이들 교육 제대로 안 되고.
◇ 김현정> 그렇죠, 그렇죠.
◆ 이동우> 이런 과정들이 있다 보니, 이제 오는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그것이 심리적 변화가 다 트라우마로 지금 해서 어느 가정 하나에 하소연하지 않는 분들이 없습니다.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면 뭐하느냐.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 사람들 대다수 저한테 하소연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 김현정> 이런 분들이 여러분, 한 10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2003년에 벌어져서 사실 우리는 생생하면서도 그래도 생존한 분들은 잘 살고 있겠지 했는데 지금 이런 상태시라는 거. 2019년에 이르러서야 조례가 만들어졌다는 거 오늘 알고 제가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선생님 끝까지 좀 힘써주시고요. 그분들도 돌봐주시고요. 세상에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 이동우> 네, 고맙습니다.
◇ 김현정> AS뉴스 대구 지하철 참사 부상자 가족대책위 이동우 위원장까지 만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