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임자운 변호사 (김종대 교수 대신 진행)
■ 대담 :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 김민하 평론가 (뉴스 빙하), 김수민 평론가 (뉴스 화산), 임경빈 작가(퀵마우스)
◇ 임자운> 4월 재보궐선거 특집에서 김종대의 뉴스업에서 매주 월요일 마련한 코너 후보로 본 한국현대사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 뉴스 화산 김수민, 뉴스 빙하 김민하 평론가 함께하시겠습니다. 반갑습니다.
◆ 김수민,김민하,차재원> 안녕하세요.
◇ 임자운> 그동안 후보에 오른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의 정치사를 조명해 봤는데요. 오늘 후보로는 서울시장 삼수째, 도전 세 번째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박영선 전 장관입니다. 일단 과거부터 정리를 해 보죠. 퀵마우스 임경빈 작가가 박영선 후보의 정치력을 정리해 봤습니다.
♣ 퀵마우스> 모두의 이력서는 역사가 된다. 정치인 박영선의 정치 약사. 1960년생. 1983년 MBC 입사. MBC 기자와 뉴스 앵커를 거친 대표적인 언론인 출신 정치인으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국회의원 초창기 대표적인 이미지는 저격수죠. 특히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을 집중 공격하는 데 앞장서면서 저격수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당시 후보 TV토론을 마치고 나온 이명박 후보를 향해 저 똑바로 못 보시겠죠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이명박 후보가 저거 옛날에 안 저랬는데라고 중얼댄 장면은 유명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박영선의 저격수 활동은 이어졌습니다. 당시 같은 민주당 소속 박지원 의원과 함께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 등을 낙마시키는 맹활약을 펼쳤었죠. 박지원, 박영선의 세트플레이를 두고 여의도에서는 박 남매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삼성 저격수로 불리며 재벌개혁론자라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스타 정치인으로 떠오른 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때는 당내 경선에서 천정배, 신게륜 등 거물급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됐지만 결국 당시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패해 첫 번째 서울시장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2012년 총선에서 3선에 성공.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법제사법위원장에 선출, 2014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 선출되면 역시 역사상 최초로 국회 교섭단체에 여성 원내대표가 됐습니다. 이후 7. 30 재보궐선거에 참패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무너지면서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당 대표 권한대행까지 겸하게 됐는데 세월호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새누리당 입장을 대폭 수용하면서 유가족들로부터 뒤통수를 쳤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이후 한동안 당내 비주류로 겉돌게 됩니다.
◇ 임자운> 2004년 정계 입성한 박영선 후보의 정치학사. 2016년 이전까지 한번 훑어봤는데요. 어떻게 들으셨어요?
◆ 차재원> 일단 박영선 후보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한국 정치사의 여성 정치인의 하나의 역사죠. 앞서 소개가 됐습니다만 제1야당 최초의 여성 정책위의장.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법제사법위원장, 여성 교섭단체 대표 이런 부분들을 상당히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리천장을 깬 대표적인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저는 그거보다도 박영선 후보가 진보진영에 몸을 담고 나서 사실은 자신의 이름이 박영선이잖아요. 저는 우리 정치권의 영선공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영선공이라는 말 좀 생소하시지만 일반 기업 같은 데 가면 건물이 부서지든지 고장이 나면 그걸 일일이 와서 수리해 주는 그런 아주 핵심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그런 기사들을 영선공이라고 하거든요.
◇ 임자운> 영선공이요?
◆ 차재원> 영선공. 그러니까 국어사전에 영선(營繕)을 찾아보면 건축을 수리하거나 이렇게 하는 그런 담당하는 업무를 영선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진보정치에 몸 담고 나서 한국정치의 부조리와 불합리, 이러한 부분들에서 나름대로는 상당히 영선공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예를 들면 지금 박영선 후보의 별칭이 뭡니까? 삼성 저격수잖아요. 삼성인으로 대변되는 재벌기업의 특혜, 특검, 반칙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상당히 바로잡으려고 했던 그런 노력들은 저는 그런 부분들을 좀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봤습니다.
◆ 김민하> 특이한 캐릭터라라고 생각이 되는 게 항상 보면 많은 정치인들이 누구의 측근이라든지 누구누구 계 이렇게 얘기하는데 박영선 전 장관은 그런 게 잘 없고. 물론 비문이다, 이런 비주류다 또 이런 분류에는 들어가지만 그런 계파나 이런 것으로 잘 분류되지 않고.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뭔가 성과를 내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앞에서 쭉 들으셨지만 어떤 경제 민주화 관련돼서 직위를 맡았다, 직책을 맡았다 그러면 그런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모든 정치인이 삼성 저격수가 되지 않거든요. 그런 직책을 맡고 뭔가 여러 가지 발언이나 추진을 해서 삼성 저격수다, 저분은 경제민주화라든가 이런 문제에 뭔가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비춰지게 되고 그리고 법사위 가서도 거기서 활동을 하면서 검찰 문제나 이런 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니까 저 사람은 또 검찰에 대해서 개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동시에 어떤 경제 관련 부처의 장관도 맡을 수 있고 또 차기 법무부 장관도 맡을 수 있고 이런 하마평이 계속 나오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또 이 사람이 편향된 정치인으로는 잘 안 비춰져요. 어떤 중도적인 입장을 갖고 있고 중도 확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데 종합해 보면 정치 인생에서 굉장히 여러 가지 국면을 헤쳐나오면서 여러 가지 행보를 해 왔지만 그게 결국은 자기 중심으로 결국에 귀결된 그런 사례라서 그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그런 정치인의 모습은 또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임자운>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을 저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만 그게 2015년 즈음해서 특위 위원장을 맡고 또 그런 관련된 발언들을 많이 하셨고 또 관련된 법안을 발의를 하셨던 게 그런 별명을 붙이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실질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생각이 저는 좀 들더라고요. 검찰개혁과 관련해서도 저는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 김수민> 한국정치에 저격수라는 명칭이 붙은 정치인은 꽤 많습니다. 사실 지금은 중진급이라서 조금 자제하고 있지만 홍준표 의원 같은 경우도 한창 DJ저격수 이런 식으로 불려졌었는데 사실은 예전에 박계동 전 의원도 있었고 저격수라는 정치인들의 화려한 플레이 이후에 제도적으로 그것이 연결되거나 한 사례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정치인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어떤 단일화 사건이라든지 사안을,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데 있어서 한국 정치가 좀 약점이 있었다 이런 것을 좀 짚을 필요가 있겠죠.
◆ 차재원> 그런데 박영선 후보가 삼성과 관련돼서 어떤 일을 했느냐라고 질문하셨는데요. 사실은 2004년, 2005년 중요한 걸 하나 해냈죠. 뭐냐하면 당시 그러니까 금산법이라고 해서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이 있어요. 이 법이 쟁점이 이것입니다. 재벌의 금융 계열사가 소유한 비금융 계열사의 지분 가운데 신고하지 않고 소유한 5% 초과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삼성이었죠. 삼성이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삼성생명하고 삼성카드가 각각 삼성전자 지분 7. 2% 그리고 삼성 에버랜드 25. 6%를 금감위 승인 없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 이거 부당하니까 빨리 바로 처분을 해야 된다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을 했는데, 당시 재경부가 상당한 유예기간을 둬야 함께 해 주신 한다는 쪽으로 가야된다는 식으로 법안을 시행력을 바꿨어요. 그래서 그걸 내니까 당시 2004년 국정감사 때 제 기억으로 박영선 후보, 그때 당시에 의원이었죠. 상당히 강하게 몰아붙였어요.
그때 야당 의원이고 초선의원이죠. 당시 재경부 총리가 누구였냐 하면 한덕수 부총리였습니다. 그 뒤에 총리까지 했죠. 그분을 상대로 강하게 몰아붙이면서 그러니까 한덕수 당시 부총리가 이것은 재경부에 대한 모독이다. 쉽게 말해서 삼성 봐주기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이슈가 돼서 결국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 금산법을 박영선 의원이 하자는 쪽으로 가자는 식으로 해서 결국 시행령이 바뀝니다. 그래서 결국 삼성이 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던 것이죠.
그리고 2014년도에도 또 한 번 법안을 하나, 삼성과 관련된 법을 발의를 하는데 이 법은 이것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99년도에 삼성이 SDS가 신주권부사채라고 하죠. 230억 원 발행을 해서 그 230억 원 누구한테 물어주냐면 이재용 부회장의 삼남매한테 몰아줍니다. 물론 여기에는 또 이학수 당시 부회장 그리고 김인주 사장 이런 사람들도 수혜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시세 차익이 6조에서 7조 가까이 되거든요. 그런 이거 상당히 원래 몰아줄 때부터 상당히 이건희 회장이 상당히 그러니까 아주 적은 증여세를 내고 자식들한테 물려주니까 그 부과에 뻥튀기 되는 것이 삼성 SDS 상장 때문에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을 박영선 의원이 2014년에 법을 발의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횡령이나 배임 등 특정 범죄 결과 본인 또는 제3자가 50억 이상의 이득을 얻는 경우에는 국가가 이를 환수하는 법입니다. 이걸 이학수법이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이 법에 대해서 당시 박영선 의원이 야당이었기 때문에 이걸 관철하지 못합니다. 19대 때 이게 자동폐기되고 나서 20대 국회 때 다시 또 본인이 냈어요. 그런데 결국은 이거는 아직까지 처리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앞서 제가 얘기했던 대로 삼성으로 대변되는 우리 재벌들의 반칙과 특권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태클을 걸어왔다 이 부분은 인정해야 될 것 같아요.
◇ 임자운> 쫙 설명을 해 드렸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은 우리 정치권에 저격수도 많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지금 우리나라의 삼성의 지배력이 어떠냐, 지금 우리나라 재벌 문제가 어떠냐를 봤을 때 저격하는 사람만 있지 누구도 저격당하지 않지 않았냐,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지 아무것도 개혁되지 않은 거 아니냐라는 국민적인 허탈함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여전하다는 말씀이고요.
이분이 정치권에 진출했을 때의 상황을 좀 보죠.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획득했을 당시에 이른바 탄돌이들이 대거 입성했을 때 MBC 선배였던 정동영 전 의원이 추천해서 대변인에 발탁됐다는 사연이 있죠.
◆ 김민하> 이게 아무래도 방송계 선후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정동영 전 의원은 이전에 정치권에 진출해서 DJ 정부 때 예를 들면 정풍운동 이런 걸 주도하면서 사실상 존재감을 크케 키웠었는데. 이때 이제 박영선 후보를 2004년에 정동영 전 의원이 영입을 했다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 정동영 전 의원이 열린민주당 의장이었는데 이때 당 대변인을 시킨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처음에는 박영선 전 의원도 거부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거는 개인사이기는 합니다만 정동영 전 의원이 나름 남편을 찾게 해 주는 배우자를 찾게 해 주는 또 역할을 했다고 해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줬기 때문에 그 빚을 갚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설득을 해서 대변인을 맡게 됐다고 해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차재원> 제가 이 부분을 조금만 더 보태면 정동영 의원이 MBC 기자를 했잖아요. MBC 기자를 했는데 이분이 정치권에 오기 전에 이분도 LA 특파원을 했어요. 워싱턴을 간 것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특파원을 했죠. 그리고 또 가기 전에 저녁 마감뉴스를 진행하면서 상당히 인기가 좋았어요. 그러다가 LA를 갔는데 그 똑같은 길을 박영선 후보도 마찬가지로 MBC 마감뉴스를 하다가 제 기억으로는 LA특파원으로 갔거든요. 그래서 LA특파원을 정동영 의장하고 아마 인수인계를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정동영 의장이 당시 그때 LA에 활동하고 있던 재미교포 그러니까 한국인 미국 변호사를 알게 됐는데 그래서 소개를 해 줬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정계에 투신하고 난 뒤에 박영선 후보에게 정계 진출을 하라고 이렇게 제안을 했을 때 거부했을 때 아니, 내가 중매를 섰는데 이것까지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없이 갔다라고 지금 박영선 후보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 임자운> 정 의원과의 그러한 관계가 2007년 대선에 결국 빛을 발하는데요. 아까 잠시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BBK 의혹을 적극 제기한 인물로도 국민들은 박영선 후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 김수민> 당시 BBK 설립의 주최가 이명박 후보가 맞느냐, 이것이 국민적인 관심 또 의혹의 대상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이미 박영선 의원이 경제부 기자 시절에 2000년 6월이죠. BBK 사무실에서 이명박 당시 현대그룹 전 회장을 인터뷰를 했었다라고 하는 그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이제 BBK 저격수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대선 막판에 광운대 강연 동영상이 공개돼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내가 BBK를 설립했다라고 하는 그 구절이 나오는 동영상이 대선 막판에 나오기도 합니다. 또 흥미로운 게 있는데 그때 당시에 여러 사람들이 정치권에 '내가 이 동영상을 갖고 있다'라고 하면서 접촉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요. 이것은 정두원 전 의원, 고인이 된 정 전 의원의 주장인데 그 접촉을 시도해 온 3인조 일당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만나서 거래에 응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잡아두기 위해서 그렇게 만나서 파출소에 신고를 해서 넘겼는데 20분 만에 박영선 의원이 나타났다라고 하는 거예요. 파출소에. 그러니까 정 전 의원 주장은 만약에 우리가 거래에 응했다면 거꾸로 약점이 잡혀서 대선 막판에 터졌을 거다라고 하는데 글쎄,이건 한쪽의 주장이기 때문에 상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어쨌든 박영선 후보가 그 당시 BBK 문제에 아주 깊이 개입을 해서 이명박 후보를 공격했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 임자운> 저도 사실은 박영선 후보 하면 BBK의혹 때 굉장히 많이 화제가 됐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데. 아까 말씀하셨던 그 정치 입문 과정을 놓고 보면 정동영 전 의원과 굉장히 관련 깊었던 걸로 보여요. 하지만 지금 정 의원과 박 후보는 사실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렇게 봐도 되겠죠?
◆ 차재원> 그렇죠. 지금 정동영 전 의장하고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결정적으로 갈라진 것은 2016년 총선 때죠. 2016년 총선 때 소위 말해서 정동영 의장과 당시 그러니까 새정치민주연합에 있었던 구 동교동계 출신 그 세력들이 떨어져나갈 때 그때 당시 박영선 후보가 같이 가자 이렇게 제안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고심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본인은 결국 따라가지 않았어요. 그걸로 하면서 사실은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가게 됐고. 그 뒤에 2017년 대선 과정에서 결국은 박영선 후보가 문재인 대선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완전히 다른 길로 완전 접어들게 됐던 것이죠.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때는 박영선 후보가 2016년도에 그때 국민의당으로 가지 않았던 것은 본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잘한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 임자운> 이후 박영선 후보는 다시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서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행보를 퀵마우스가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 퀵마우스> 원내대표 사퇴 이후에는 민주당 내 대표적인 반문 인사로 꼽혔습니다. 2015년 박남매 파트너였던 박지원 의원을 포함한 호남계 반문인사들이 연속 탈당. 마지막까지 탈당을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결국 마지막에는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죠. 이때 탈당한 이언주 전 의원과 향후 정치 행보가 크게 엇갈리면서 일명 "언주야, 언니는 행복하단다"라는 인터넷 유행어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6년 20대 총선 때는 김종인 비대위의 실세로서 친노계 인사 공천탈락 인사의 한 축이라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었고 2017년 대선 경선 때는 안희정 후보 캠프에 참여해 문재인 저격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안희정 캠프 박영선 멘토단장의 매콤한 비평 들어보시죠.
[박영선 / 안희정 캠프 멘토단장(2017년)] "문재인 후보가 어떤 리더십에 있어서는 불안하고 그다음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의 리더십이다라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들이 상당수 많이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와 같이 한번 일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는 문제, 포용적 리더십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 퀵마우스> 아이고. 아프기는 하겠네요. 하지만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에는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활약했고 결국 2019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임명되는 오랫동안 갈등했던 친문계와 드디어 화해를 했습니다. 이번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문 대통령 지지자들의 대표적인 구호를 내세우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2011년과 2018년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박영선. 이번에는 저격수에서 행정가로의 변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 임자운> 2015년 이후부터 최근 박영선 후보의 행적까지를 짚어보았고. 박영선 후보는 최근 본인이 원조 친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들어보시죠.
[박영선 /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사실 저는 원조 친문이거든요. 제가 대통령님 모시고 다녔어요."
◇ 임자운>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친문, 친박 뭐 이런 얘기가 저는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이것이 정치적인 셈법이 아직까지도 효능이 있어서 사실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있는 거겠죠. 2012년 대선캠프에서는 문재인 후보를 지원사격을 했지만 그 뒤로 박 후보는 비판적인 행보를 보였죠. 2014년 당이 크게 흔들릴 때도 문재인 리더십을 비판을 한 적이 있고 앞서 정리한 내용에서 나왔듯이 대선에서는 안희정 후보 캠프에 있었어요.
◆ 김수민> 이게 저는 변곡점이 된 게 2014년 8월에 있었던 세월호특별법 관련한 합의였던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예를 들면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이런 계기들을 통해서 박영선 하면 대표적인 야권 정치인, 전도유망한 정치인 이렇게 탄탄대로를 걸어왔었는데 본인이 원내대표가 되고 나서 세월호특별법 협상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협상에서 여러 가지의 쟁점들이 있었어요. 특별검사 추천권을 여권에 주느냐 야권에 주느냐. 그리고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어떻게 하고 또 수사권이나 기소권을 얼마나 주느냐 이 문제가 있었는데 박영선 대표는 그 당시에 특검추천이나 이런 것보다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야당 측 그리고 유가족 측 의원이 많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에 좀 심혈을 기울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유가족 측에서 원래 요구했었던 수사권이나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 이런 것들이 관철이 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이제 얼마되지 않은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자리를 내려놓게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좀 민주당의 어떤 주류 지지층이라든지 이쪽하고는 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 때 박영선 또 나가느냐 아니냐 여기까지 연결된 것 같아요.
◆ 김민하> 그 부분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마찰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그전까지의 상황이 대단히 안 좋았기 때문에 지도부가 다 물러나고 박영선 원내대표 혼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때 비대위도 이제 꾸려야 되는 상황이 됐거든요. 그래서 박영선 비대위를 꾸렸는데 그 박영선 비대위에서 또 비대위원 누구로 할 거냐 이런 문제가 되면서 그 당시에 이상돈 교수를 한다고 해서 그게 결정적으로 박영선은 못 믿겠다라는 분위기가 주류에서 형성된 이후였죠. 그래서 이게 박영선 현 후보가 그때 비대위를 맡는 건지 아닌지, 비대위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굉장히 좀 격론이 오가다가 결국에는 비대위원이기는 한데 이제 다른 형태의 비대위, 문희상 비대위로 넘어가는 그런 과정이 또 이어졌던 걸로 저는 기억을 하는데
보통 정치인이 이러면 예를 들면 철세라든가 기회주의자라든가 원칙이 없다든가 이런 비판을 받게 됩니다. 박영선 후보도 실제로 그 과정에서 받았고요. 그런데 이런 행보가 결정적으로 어떤 정치적으로 타격이 된다든가 그러지 않았거든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게 그러니까 이 캐릭터의 강점인 것 같아요. 뒤집어서 얘기하면 어떤 문제를 수습하려고 하고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파열음들이 있는데 그게 어떤 상처로 남지 않는 게 어떻게 보면 정치적 능력인 것이고 어떻게 보면 그게 이미지를 지켜가는 방식인 것이고 그런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 차재원> 제가 거기에 조금 더 부여를 하면 2014년 7월 30일날 재보선을 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패배를 합니다. 그 때문에 대표였던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가 물러나고 비상대책위가 조직이 됐는데 아무도 대책위원장을 맡으려고 안 해요. 당시 그때 대표권한 대행이 박영선 원내대표였는데 문희상 의장을 찾아가니까 문희상 의장은 안 하려고 해요. 그래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는데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월호특별법과 관련돼서 당내 반발에 부딪히고 결국은 새로 비상대책위원장을 모셔오자. 그래서 모셔오게 된 사람이 이상돈, 안경환 두 사람이었습니다
안경환 기억하시겠지만 이번 정권의 사실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 물망에 올랐다가 탈락하신 분인데 그분은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지만 이상돈 교수는 과거 72년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이었거든요. 그래서 당내 상당히 반발이 심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박영선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 이상돈 교수를 영입하는 거 가지고 당시 문재인 의원하고 그러니까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이상돈 교수도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문재인 의원하고 통화를 해서 사실상 허락이 됐다는 거예요. 사실상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 그래서 나중에 당내에서 이상돈 교수에 대한 반발이 나오니까 거기에 대해서 문재인 의원이 모른 척했다. 그 부분이 상당히 박영선과 문재인 두 사람의 상당히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 임자운> 박영선 후보 하면 또 하나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게 2015년 사태 때 대거 당을 탈당하는 의원들이 많았는데 그때 이제 박영선 후보가 남느냐 가느냐 사실 굉장히 많은 진단, 예측들이 있었는데 결국 잔류를 하셨단 말이죠. 그때 상황에 대해서 기억하시는 분이 있나요?
◆ 차재원>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2015년 말 때 사실 비주류들은 대거 탈당을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앞서 2014년에 그런 감정의 골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갈 거라고 봤어요. 갈 거라고 봤는데 결국은 낭맜죠. 본인은 만약에 그때 국민의당으로 갔으면 그때 당시 국민의당 녹색 바람이 불었지만 서울에서는 당선자 2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철수 대표하고 김성식 의원, 김성식 의원도 아슬아슬하게 됐죠. 아마 그때 제 생각으로 박영선 후보가 그때 국민의당으로 갔다고 하면은 구로에서 계속 출마를 했다고 하더라도 저는 민주당 벽을 못 넘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랬다고 본다면 사실상 지금의 박영선은 없을 수도 있는데, 본인 생각에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을 거예요. 나름대로 판단을 잘한 것 같아요. 만약에 그쪽으로 가면 안철수패도 아니고 호남 쪽 자신 출신도 아니잖아요. 그런 걸 고민했던 것 같아요.
◆ 김민하> 그때도 가느냐 마느냐에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서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좀 비춰줬거든요. 그게 연속된 어떤 현상인데 뭔가를 결단할 거냐 마느냐에서 계속 뉴스의 중심이 됩니다. 이런 게 흔치 않은데 그걸 본인이 활용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인지 그거는 역사가 평가하겠죠.
◇ 임자운> 전략의 결과냐 아니면 운이냐, 이런 의문이 있다라는 말씀 같은데요. 당시 저도 기억합니다. 이언주 의원과 박영선 의원의 행보가 되게 상반되게 비교가 많이 되면서 지금 이언주 후보...
◆ 차재원> 그런데 이언주 후보는 그때 탈당 안 했습니다. 이언주 후보은 2016년 민주당으로 공천을 받아서 당선되고 난 뒤에 그 뒤에 탈당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이언주 후보 나갈 때 같이 안 나갔어요.
◆ 김수민> 그때까지는 같이 있다가 대선 앞두고 박영선 의원은 탈당설이 나왔는데 탈당 안 하고 이언주 의원만 그때 탈당을 했었죠.
◇ 임자운> 박영선 후보 하면 떠오르는 국회 일화 중 하나가 필리버스터 도중에 눈물을 흘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한 장면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영선 / 더불어민주당 의원(2016년)] "저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십시오. 그리고 제가 다 맞겠습니다. 대신 국민 여러분께서 분노하신 만큼 4월 13일 총선에서 야당을 찍어주십시오. 야당에게 과반 의석을 주셔야 여러분들이 원하던 그런 평화롭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이 온통 새누리당의 그 시뻘건 물결로 덮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야당을 4월 13일날 찍어주십시오."
◇ 임자운> 이게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중단을 선언하면서 나왔던 장면인데요. 당시 사실 많은 비판도 있었는데 그때 상황에 대해서 기억하시는 분들 있나요?
◆ 김수민> 아마 이때가 박영선 후보가 이미지적으로 가장 저점으로 찍었을 때가 아닌가 그렇게 기억이 됩니다. 이 상황은 이제 처음에 필리버스터를,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해서 처음에 민주당이 시작을 했는데 시작할 때는 지지층이 결집도 하고 많은 화제가 되었었죠. 그런데 당시 여론조사를 다시 살펴봐도 찬반이 좀 비슷하게 나오는 그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역으로 새누리당 쪽도 결집할 수 있겠다 이런 판단을 당시에 민주당 지도부에서 한 것 같습니다, 김종인 비대위도 금방 출범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본인이 이것을 마무리짓겠다라고 들어와서 이렇게 눈물의 연설을 하게 됐는데 지지층한테는 굉장히 비판을 많이 받았었고요.
그리고 이 사건 하나가 아니라 조금 그로부터 며칠 전에 사건이 또 하나 있었는데 2016년 2월이죠. 기독교단체 쪽에서 국회에서 기도회를 갖습니다. 그래서 김무성 대표라든지 당시에 어느 정도 지도부 공백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박영선 비대위원 이렇게 부르는데 그 자리에서 박영선 비대위원이 "동성애법은 하느님의 섭리에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민주당도 당연히 반대한다" 발언해서 규탄받기도 하고 거꾸로 전광훈 목사, 현장에 있었던 전광훈 목사에게는 "박영선 의원을 야당 대표로 세웁시다" 그런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 또 지금은 고인이 되진 MBC의 이용마 전 기자가 "박영선 선배는 MBC에 있을 때 사실은 경제부장으로 있으면서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도를 했었다" 이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었죠. 그래서 진보적 지지층 내부에서는 굉장히 규탄을 받기도 했던 그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 임자운> 박영선 후보의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이런 발언도 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과거의 발언은 사실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이 되고 있고 최근에도 토론회에서 그 관련 질문이 나왔는데 저는 그 답변 내용이 굉장히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본인도 생각은 있으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정치인이 그런 발언, 자신의 생각을 발언하는 것보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토론회가 사실은 정치인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기억이 있고요. 2016년 20대 총선이 박영선 후보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어떤가요?
◆ 차재원> 박영선 후보는 개인적으로 4선을 했기 때문에 완벽한 일종의 중진의원으로서 자리를 잡았지만 저는 박영선 의원에 대한 이런 의미보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그 의미가 더 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때 민주당이 사실 앞서 우리가 얘기했던 2015년 말에 새정치민주연합, 당명 바꾸기 전에 새정치민주연합이었는데... 그때 박지원, 정동영, 이런 분들이 탈당하면서 사실은 이렇게 '일여다야' 구도로 총선을 치른 국면이라서 다 참패할 거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2016년 어떻게 보면 그때 당시 진박 논쟁 때문에 , 옥새를 갖고 나르샤 그런 파동들 때문에 새누리당이 분열하면서 그 반사이익을 봤죠. 반사이익을 받으면서 단 한 석 차이지만 1당이 됐다는 게 그 자체가 저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
첫 번째는 정권교체 가능할 수 있겠구나. 중도층들이 모일 수 있는 하나의 여건을 만들었다는 거고. 두 번째는요. 아주 실무적으로 중요한데 국회의장을 차지했다는 거예요. 만약에 당시 그때 정세균 의장, 민주당에서 국회의장을 차지못했다고 하면 2016년 12월달에 탄핵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약에 그러니까 여당 소속의 국회의장이었다고 하면 탄핵 과연 강력하게 밀어붙였을까. 그런 생각이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2016년 총선은 민주당한테 정말 상당히 중요한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 임자운> 이후 박영선 후보는 특히 2017년부터는 본격적인 친문 행보를 보였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대선에서 후보 확정 이후에 문재인 캠프에 합류를 했었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 나름 활약을 했죠. 그래서 당시 당내 통합의 상징으로 비춰지기도 했고 결국에는 2019년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현 정부에서 발탁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 박영선 장관 청문회가 황교안 청문회가 돼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당시 상황이 어땠던가요?
◆ 김민하> 그게 이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문제였죠. 김학의 전 차관이 임명되기 며칠 전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왔는데 그때 동영상 CD를 입수를 해서 박영선 장관이 이미 내용을 파악을 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이제 발언들 한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박지원 당시 의원도 그때 당시에 CD하고 이런 것들을 봤다 이러면서 이제 얘기를 해서 화제가 많이 됐던 건데. 이것에 대해서 사실은 이후에 또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CD나 이런 거는 어느 시점에 어떻게 입수하게 된 거냐 이런 논란도 벌어지고 해서. 그런데 여기서도 사실은 이전에 그 이력이나 이런 것들이 강조가 됐던 거죠. 나름대로 검찰개혁이나 이런 데에서 목표를 높였다, 과거에 검찰총장을 낙마시켰다. 그리고 법사위에서 굉장히 활약을 많이 했다....이게 앞서도 말씀하셨듯이 실질적으로 어떤 정치적 영향을 미친 거냐는 사실은 확실하게 지금까지 이런 성과다 얘기할 수 있는 거는 아닌 거죠, 결국에.
◆ 차재원> 그런데 박영선 후보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이게 어떻게 보면 전술을 잘 쓴 거예요. 그러니까 스포츠에서 이런 말 쓰잖아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사실은 이때 박영선 장관 청문회를 둘러싸고 박영선 장관이 개인적인 의혹들을 야당에서 상당히 지적을 했어요. 그래서 여론이 상당히 비판적으로 돌아서고 있었는데 당시 또 그때 당시 정치적 쟁점이 바로 김학의 전 법무차관에 대한 지금 재수사 여부, 재조사 여부가 핵심으로 떠올랐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때 박영선 후보가 자기가 과거 국회 법사위원장 할 때 지금 김학의 차관 CD를 먼저 받고 그걸 본 그날 그때 마침 법사위가 열려서 황교안 장관이, 법무부 장관이 왔길래 내가 이거 이야기해 주면서 절대 임명하면 안 된다 그랬는데도 임명 강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교안 장관이 사실은 이 김학의 차관의 그런 임명을 했다는 식으로 완전히 한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때 당시 황교안 장관이 자유한국당의 당대표였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축구 골대를 자기 앞에 있는 골대를, 축구 골대를 상대 야당 쪽으로 밀어붙인 거죠. 그러니까 그 청문회 이슈가 완전히 다 덮이면서 황교안 대표가 당시 그걸 알았냐 몰랐냐 쪽으로 완전히 시선이 쏠려버렸거든요. 사실은 청문회를 상당히 어떻게 보면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이 안 됐지만 사실은 좀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던 거죠.
◇ 임자운> 그러한 청문회를 거쳐서 박영선 후보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서도 2년의 기간을 보내셨고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세 번째 도전에 나섰습니다. 경선 전부터 포근함, 따뜻함을 강조하는 모습이 보여서 중도 확장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니냐라는 평가들이 있고요. 최근에 불거진 LH 사태가 이 박 후보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평가가 또 있는 것 같습니다. 4월 재보궐선거 특집으로 마련한 코너, 후보로 본 현대사 오늘 박영선 후보로 보는 현대정치사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