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성범죄 누명 쓴 발달장애인, 경찰 부실수사 정황도

파출소에서 "불러주는대로 적어라"…강압 진술 의혹
①전담경찰 배정 ②신뢰관계인 동석…모두 안 지켜져
경찰 "신뢰관계인 동석은 형소법상 임의규정"
"전담경찰 배정 안 된 것은 업무상 미비로 잘못"
전문가들 "경찰 수사 문제…내부감찰·국가배상 필요"

그래픽=고경민 기자
버스에서 음란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쓴 자폐성 장애 3급 김영민(가명·32)씨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발달장애인 관련법과 수사 매뉴얼을 위반하는 등 부실수사를 한 정황이 포착됐다.

◇신뢰관계인 동석 안 하고, 전담경찰 아닌 수사관에 배정…"법 위반"

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2019년 9월 당시 영민씨 사건을 맡은 수원남부경찰서 소속 A 경위는 발달장애인 전담경찰관이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015년 11월 시행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발달장애인 지원법) 제13조를 보면, 특별한 사정이 없을 경우 발달장애인은 지정된 전담경찰이 조사해야 한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수원남부서는 초동 수사 단계에서부터 영민씨가 자폐 3급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런데도 발달장애인 전담경찰이 아닌 A 경위가 영민씨를 조사한 것은 법 위반 소지가 있다.

다른 문제도 있다. 경찰은 영민씨를 불러 피의자 조사를 진행하면서, 신뢰관계인을 동석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것 역시 조사 과정에서 발달장애인과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을 동석하게 해야 한다는 발달장애인 지원법 제12조(형사·사법 절차상 권리보장)에 어긋난다.

이런 법 조항은 가해자로 지목된 지적·발달 장애인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 않도록, 최소한의 진술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지난 2019년 9월 10일 오후 버스에 타고 있는 영민(가명)씨 모습. 버스 내부 CCTV 영상 자료.
◇피해자 "강압적으로 진술 종용" 주장…자위행위 부인 첫 진술 묵살

당시 경찰의 초동 수사가 엉터리로 이뤄졌다는 의혹도 있다. 영민씨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 수원터미널에서 권선파출소로 임의동행됐다. 이후 '불러주는대로 진술서를 쓰면 집에 갈 수 있다'는 현장 경찰관 말을 듣고 자백 진술서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CBS노컷뉴스가 확보한 임의동행 보고서에는 '피혐의자 최초 진술은 자위행위를 한 적이 없고 성기 부분이 가려워 긁었다며 음란행위를 부인했지만, 지속적으로 묻자 자위 행위를 했다며 범행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고 나온다.

파출소에서 영민씨는 "허벅지가 가려워서 긁었다"고 진술했지만 이런 진술이 묵살된 셈이다. 당시 현장 경찰은 영민씨 스스로 진술서를 쓰고 있는 모습을 사진 촬영까지 해 사건 기록에 첨부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2019년 9월10일 김영민(가명)씨 임의동행 보고서. 영민씨 측 제공
◇경찰 "전담경찰 배정 안된 것은 잘못…신뢰관계인 동석은 강제 아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발달장애인 전담경찰을 배정하지 않은 것은 업무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신뢰관계인 동석은 형사소송법상 강제조항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형사소송법상 신뢰관계인 동석은 강제가 아닌 임의규정"이라면서 "전화로 소환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피의자는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한 상태였고 의사도 명확히 표현했다. 사물변별 능력이 없거나 의사소통 능력이 없다고 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변호인으로부터 법률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고지했지만 피의자 본인이 원하지 않았다"며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검사가 항소해 2심이 진행되는 만큼, 남은 재판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담경찰관이 사건을 맡지 않은 것은 잘못이 맞는다. 당시 업무상 발생한 미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한형 기자
◇전문가들 "장애인 수사 총체적 문제…감찰·국가배상 이뤄져야"

전문가들은 경찰 수사가 명백히 관련법 위반 소지가 있으며, 감찰을 통한 징계도 이뤄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는 "처음부터 피의자가 발달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전담경찰관이 수사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위법"이라면서 "법 조항뿐 아니라 경찰 내부 수사 관련 지침도 어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2015년 제정된 경찰 내부 '장애인 수사 매뉴얼'에는 조사 시 신뢰관계자 동석을 해야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어 "발달장애인의 경우 육하원칙에 따라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며 "초동 수사나 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진술이 강압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도 지적했다.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 최정규 변호사는 "발달장애인이 성범죄 전과가 생길 경우, 공공기관이나 복지기관에서 일자리를 구할 기회 자체가 제한된다"며 "단순히 전과자가 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 자체가 막히는 문제다. 수사기관이 더욱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영민씨는 이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서울의 한 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일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만약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당장의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향후 취업도 제한될 판이었다. 성범죄자의 경우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등에 최대 10년 동안 취업할 수 없다.

정식 재판이 청구되고 나서야 사건을 처음 인지한 영민씨 어머니가 장애인 단체와 변호사 등을 백방으로 찾아 다니며 무죄를 호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민씨는 수사와 재판을 거치며 스스로 일을 그만두긴 했지만 앞으로 무죄가 확정되면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최 변호사는 "수사기관의 관례적인 일처리로 당사자가 겪는 고통이 너무 큰 상황이다. 내부 징계뿐 아니라 경찰과 검찰을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도 가능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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