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가 돌아왔다'(2012) '곡성'(2016) 연출부를 거치며 현장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온 배 감독은 '빛과 철'을 통해 장편 영화에서도 그간 가꿔 온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번 영화에서도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면서도 밀도 높게 그려내며 순간을 포착했다.
배 감독은 최근 화상 인터뷰에서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이끈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가 연출자를 꿈꾸게 된 시작과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봤다.
- 무엇이 연출자의 길로 이끌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빠르게 영화감독을 꿈꾸지는 않은 거 같아요. 대학 3학년 때쯤 일반인 대상의 필름 워크숍을 들었는데, 영화 제작 과정을 알게 되면서 재밌다고 생각했죠. 워크숍이 끝나고 친구들을 모아서 작은 단편영화를 만들었어요. 힘도 많이 들었지만 재미도 있고, 한 편 만드니 또 만들고 싶어서 조금 더 해보자 생각했죠. 그렇게 단편을 만들다 더 배우고 싶어서 학교에 들어갔어요. 감독이 된 건 어떻게 보면 우연적이라 할 수 있죠."
- '빛과 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감독님의 손길을 거친 첫 장편 영화인데요. 이번 영화를 통해 감독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이룬 성취나 배움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빛과 철'을 통해 보완할 점을 보았다면 무엇이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처음부터 혼자 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며 가장 크게 배운 것 중 하나가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영화를 만들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거 같아'라며 자기 합리화, 자기 타협을 많이 하죠. 그렇지만 조금 힘이 들고 눈치 보여도 한 발 더 나갔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감독이 포기하는 순간 영화는 끝이라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빛과 철'은 인물의 영화, 배우의 영화였는데요. 모든 시간을 배우와 이야기하는 데 썼어요.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기술, 촬영, 조명, 미술 등 스태프와 이야기할 시간이 적었죠. 스태프들이 아쉬워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그 마음을 알면서도 다 품고 가기엔 제 역량이 부족했죠. 앞으로 보는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스타일을 가진 연출자인가요?
"이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 많이 깨달은 게 있어요. 영화에서 가장 시네마틱한 순간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그건 '눈빛'이죠. 그리고 내가 과연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고 영화에 무엇을 담으려 할까 생각하면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요.
두 인물이 만나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고 싶고, 이 인물들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눈빛을 보일까 그게 가장 궁금해요. 배우의 대사가 아니라 잠깐 보여준 눈빛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담겨 있어요. 거기에서 공감과 깊이, 인물의 이야기를 찾지 않을까요? 그 장면을 위해 다른 것을 구성해 나가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런 걸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고자 하는 게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끝까지 잃지 않고 가져 가려는 지향점일까요?
"영화는 결국 인물이고, 감정이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걸 담기 위해서 다른 건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모든 걸 집중하고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요. 나머지 것으로 인해 인물의 감정을 놓치면 그 영화는 저에겐 영화가 아닌 거 같아요."
- 연출을 하거나 혹은 감독으로서 작업하면서 많은 영감을 주는 혹은 심적으로 위안을 주는 영화감독이 있나요?
"있긴 있는데 너무 옛날 감독이네요.(웃음) 많은 영화를 좋아하고 많은 감독을 좋아하는데, 항상 제 마음에 남는 감독은 옛날 일본 영화감독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에요. 그의 작품은 대부분 여자가 주인공이에요. 강인해 보이다가도 나약해 보이고, 감정을 품었다가 폭발하는, 인물의 감정을 충실히 담아내려 노력하는 감독이죠. 볼 때마다 많은 위안을 받고 행복을 느껴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 '흐트러지다' 같은 작품을 많이 좋아해요."
- '빛과 철'을 보며 감정적인 위로를 받는 관객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혹시 감독님을 심적으로 위로해 준 영화가 있다면 어떤 영화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최근 봤던 것 중에 말하자면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요. 다시 보면서 저의 이상향 같은 영화였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화양연화'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다시는 영화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생각한 모든 완벽한 게 다 있어요.
저한테는 영화라는 것이 과거의 순간을 다시 재현하고 싶은 마음인 거 같아요. 그게 잘 안 되고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한 번 시도해보는 마음이 영화의 가장 큰 이유죠. '화양연화'에는 1960년대 빛났던 시절을 시간이 흘러 흘러 다시 재현해 보려는 마음, 인물에도 왕가위 감독의 마음이 다 담겨 있죠.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그만둘 수 있겠지만, 저는 계속 못 만들 것이기에 계속 영화를 만들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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