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부주의한 답변'에 사과한다면서도 녹취록 속 발언을 부인하기 바빴다. 사과 방식 또한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개 사과가 아닌 법원 관계자만 볼 수 있는 내부망에 글을 올리는 수준에 그쳤다. 대법원장 스스로가 사법부 신뢰 추락을 자초했지만 책임 지는 과정에서조차 떳떳치 못한 방식을 택했다는 지적이다. 법원 안팎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김 대법원장은 19일 낮 12시쯤 법원 내부망에 A4용지 2장짜리 입장문을 게재했다. 이달 4일 임 부장판사의 녹취록과 음성파일이 공개된 후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답변해 송구하다"고 짧은 입장을 밝힌 지 15일 만의 입장 표명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현직 법관이 탄핵 소추된 일에 대법원장으로서 안타깝고 무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결과와 무관하게 국민들께 송구하다"며 임 부장판사의 탄핵 소추에 대한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어 임 부장판사와의 사표 반려 과정에 대해서는 "해당 법관의 사직 의사 수리 여부에 대한 결정은 관련 법 규정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한 판단이었다"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고려가 있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사표 반려 당시 정치권의 눈치를 살폈다는 비판이 일자 정치적 판단이 아닌 법적 절차만을 고려했다는 해명이다. 김 대법원장은 추가로 "제가 해당 사안에 대하여 정치권과의 교감이나 부적절한 정치적 고려를 하여 사법의 독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명백히 정치권, 특히 여권을 의식했다는 이야기를 자신이 해놓고도 사과문에서는 정작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았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녹취록 발언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법규정 등 여러 사정을 살폈다"는 주장이 전부였다. 이에 대해 한 고위 법관은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떤 사실에 근거했는지 말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나오지 않았다"며 "대법원 예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든지 그런 팩트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입장문에서 분명 '국민들께 송구하다'고 적시하고서도 국민들이 접할 수 없는 법원 내부 통신망을 통해 공개한 방식을 놓고도 말들이 나온다. 대법원장이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법 불신을 스스로 야기했음에도 사과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사법농단' 당사자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2016년 김수천 부장판사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긴급 전국법원장회의를 열고 직접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보다 10년 앞선 2006년에는 당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조관행 전 부장판사의 재직시절 금품수수 비위에 대해 "전국의 모든 법관들과 더불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 전직 법관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장 스스로 야기한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문을 법원 내부망에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법원장이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하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사과문을 공개하고서도 퇴근길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아무말 없이 청사를 나섰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김 대법원장에 대한 반발, 사퇴 요구가 확산하고 있으니 판사들을 다독이기 위한 사과로 보인다. 이렇게 인정을 안 하는 사과라면 할 이유가 없다"며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