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에 올백머리, 그리고 보잉 선글라스를 낀 장 선장은 나른하면서도 여유롭고 거침이 없다.
장 선장은 한때 악명 높은 우주 해적단 선장이었으나 신분을 바꾼 후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를 이끈다. 막말은 기본이다. 늘 술에 절어 있고, 안하무인 성격 탓에 거친 우주 노동자들도 혀를 내두른다. 그게 장 선장이다.
허술한 듯, 막 나가는 듯 보여도 못 다루는 기계가 없고 비상한 두뇌와 남다른 리더십으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빛을 발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간에 "안 돼. 정의롭지가 못해"라고 외치지만, 기실 그의 내면을 마주한다면 장 선장다운 말이구나 싶다.
배우 김태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로 2092년 광활한 우주에서 승리호를 이끌었다. 최근 온라인을 통해 만난 김태리는 '승리호' 속 장 선장이 가진 매력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국 첫 우주 SF를 통해 만난 거대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 한국 최초 우주 SF라는 점 말고 또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승리호'에 승선하셨나요?
"장 선장한테 매력을 느꼈습니다. 일단,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를 굉장히 심플하고 재밌게 너무 잘 만들었어요. 장 선장 하나가 주인공이 아니라 4명이라는 주인공이 다 함께 으쌰으쌰 해서 지구를 구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재밌었고, 그 안에서 저라는 배우가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했어요.
장 선장은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제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이야기는 너무 재밌는데 이미지는 내가 아닌 거 같은? 감독님께서 오히려 그런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을, 그러니까 우락부락하지 않은 사람이 선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나오는 포스가, 전형적인 인물이 앉아있을 때보다 클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어요."
- 여성 리더 장 선장 역할을 매우 잘 소화했는데 연기를 하면서 부담이 되지는 않으셨나요?
"많이 됐죠. 감독님께서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면 좋겠기에 태리씨가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제 머릿속에는 '선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이 있었어요. 그런 이미지를 깨는 게 힘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구석구석 살피면서 인간적인 면모, 그러니까 너무 완벽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바보 같기도 하고, 나 혼자 잘난 인물이 아니라 크루들과 함께 하고,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어디서 줄 수 있을까 찾아내려 노력했죠.
꽃님이(도로시)를 대하는 장면에서도 따뜻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 같고, 짧은 순간순간이지만 업동이를 챙기고 내가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믿음이 보이게끔 그런 작은 부분을 계속 찾으면서 연기했어요."
"장 선장은 가장 평범한 사람일 거 같아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우주개발기업 UTS(Utopia Above The Sky)를 박차고 나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무리를 꾸리죠. 마지막에는 어떻게 보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어려운 선택까지 하는데요.
다른 인물들은 여러 일을 겪는 등 선택을 하기까지 과정이 있다고 본다면, 장 선장은 오랜 세월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죠. 영화 '1987'에서 연희가 광장으로 나오게 된 데 뚜렷한 계기 있는 건 아니에요.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죠. 장 선장 역시 그런 마음으로 갖게 된 신념에 따라 자기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그게 입속에 달고 다니는 자폭장치로 설명이 되는 거 같아요."
- 장 선장의 외형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장 선장의 외적인 부분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모든 것은 감독님 머릿속에 있었고요. 감독님이 저한테 캐스팅 제안을 주시기 전부터 생각해 온 이미지가 그대로 영화 속에 재현된 거예요. 제가 선택한 지점은 머리 스타일뿐인데, 감독님이 '편한 대로 하세요'라고 해서 전에 했던 화보 중 괜찮은 걸 장 선장 머리로 제안해 채택된 거예요."
- 극 중 장 선장의 대사 중 김태리씨가 생각하는 명장면이나 명대사가 있나요?
"저는 장 선장 대사 중 '안 돼. 정의롭지가 못해'라는 말을 제일 좋아해요. 장 선장이 그 대사를 하는 장면에서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런 대사를 썼다는 게 이중적이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말하는 그런 애매모호함이 마음에 들어요.
좋아하는 장면은 장 선장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오프닝에서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를 소개하는 전투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이 정말 멋있고, 승리호를 말해주는 멋진 시퀀스인 것 같아요."
- 대부분이 VFX(Visual Effects·시각적 특수효과)로 구현된 영화인데 연기하는 과정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되게 재밌었어요. 제한적인 환경 속에서 스크린 안에 어떤 식으로 모습이 담길지를 연구하는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같이 함께해서 즐거운 경험이었죠.
그냥 초록 스크린을 보고 연기하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제가 우주복을 입고 와이어를 매단 채 우주선 밖에서 계단을 오르는 장면 등 모든 것이 다 감독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미술팀, 소품팀 등 모든 스태프의 손으로 만들어진 장면이거든요. 예전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승리호'는 조금 더 같이 만드는 게 많았어요."
"너무 좋았어요. 선배님들한테 힘을 많이 받았죠. 촬영하면서 혼자서 고민도 많이 하고, 머리를 싸잡고 있을 때 조언도 많이 해주셔서 즐겁게 촬영했어요. 저는 인복이 참 많은 거 같아요. 지금까지 다 너무 좋은 선배님들만 만났거든요. '승리호'도 정말 행복하게 작업했어요."
- 영화는 2092년 지구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하는데요. 혹시 이번 작품을 만나기 전 한 번쯤 상상해본 미래의 모습이 있을까요?
"저는 좀 되게 각박한 세상을 상상하는 편이어서요. '승리호'랑 비슷한 거 같아요. 우주로 나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황폐해진 느낌이라기보다 좀 더 세상 살기가 각박해진 미래 같은 것들이 생각나서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생각하면 그런 상상밖에 없어서….
요즘은 한국에서도 SF 소설이 많이 나오고, 지금 촬영하고 있는 영화 '외계인'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보면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이 사람이 생각하는 세계는 이렇구나' '이런 세계가 있을 수 있겠구나' 이런 걸 상상하며 보면 너무 재밌어요."
"가능성, 너무 많이 보이지 않나요? 일단 이제 우리나라에서 구현해내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는 점이 가장 크게 다가왔던 거 같아요. 오직 한국의 기술력으로 만든 영화니까요. 많은 예술가께 영감을 줄 수 있는 멋진 이야기가 나온 거 같고요. 그런 영화에 제가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승리호'는 장르도, 규모도 정말 큰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평소 해왔듯이 내 캐릭터에만 집중하기에는 외부적인 부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살짝 헤매기도 했어요. 제일 중요한 건 마음가짐인 거 같아요. 다 같이 모여서 영화를 재밌게 만든다! 그 지점에 집중해서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잘하자는 마음으로 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부담감은 빨리 떨쳐버리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승리호'라는 영화 혹은 장 선장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시청자(관객)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렇게나 재밌는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영화를 보는 그 순간의 재미, 이걸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관객분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렇습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