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분을 통해서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게 기업 총수의 당연하고도 중요한 과업이라고 여겨졌다.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외국의 기업가 뉴스는 우리 사회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현실로 만든 기업인이 나타났다.
◇배민 김봉진 의장 "기부는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유산"
1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배달의민족 김봉진 의장은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는 '더기빙플레지' 기부클럽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더기빙플레지에 참여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본인의 재산이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 1000억 이상일 것. 그리고 그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할 것.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테슬라 CEO 앨런 머스크가 더기빙플레지의 회원이다. 기빙플레지 회원의 약 75%는 빈손으로 시작해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들이다.
그리고 전라남도 완도군 작은 섬에서 태어나 개천에서 용이 된 김봉진 의장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재산 환원은 배달의민족 창업 초기부터 이루고 싶었던 그의 꿈이었다고 한다.
"10년 전 창업 초기 20명도 안 되던 작은 회사를 운영할 때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기사를 보면서 만약 성공한다면 더기빙플레지 선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꿈꾸었는데 오늘 선언을 하게 된 것이 무천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꾸었던 꿈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도전하는 수많은 창업자들의 꿈이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김 의장은 "저와 저의 아내 설보미는 죽기 전까지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선언한다"며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 한나, 주아도 이 결정에 동의했음을 알려드린다"고 강조했다.
이어 "셋째 다니엘은 아직 두 살이라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훗날 자라면 누나들과 잘 설득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또 "기부가 자녀에게 주는 어떤 것보다 최고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앞으로 교육 불평등에 관한 문제 해결,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 자선단체들이 더욱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조직을 만드는 것을 차근차근 구상하겠다"고 밝혔다.
김봉진 의장은 수도전기공고와 서울예술대학 실내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디자인그룹 이모션, 네오위즈, 네이버에 다니다가 2010년 자본금 3천만원으로 우아한형제들을 창업했다.
'배달의민족'을 국내 배달앱 1위로 키운 김 의장은 2019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에 배민을 40억 달러(4조4천억원)에 매각했다. 김 의장이 매각 대금으로 받은 주식의 가치가 뛰면서 그의 재산은 현재 1조원대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평범한 회사원 출신의 카카오 김범수 의장도 앞서 지난 8일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건국대 사대부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SDS에 입사했다가 1998년 한게임을 창업했다. 2010년 카카오톡을 내놓은 뒤 2014년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인수했다.
그의 재산은 카카오 주식 등 10조원이 넘어 기부액이 5조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범수 의장은 "격동의 시기에 사회 문제가 다양한 방면에서 더욱 심화하는 것을 목도하며 더 결심을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뒤 '면피용' 기부가 아닌, 김봉진·김범수 의장처럼 소신을 갖고 기부에 동참하는 점차 기업인도 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지난해 전재산인 766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기업가인들의 이같은 '선행'은 형제들 끼리, 숙질간에 지분싸움을 벌이는 일부 재계 인사들의 움직임과 대비되면서 재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창업자들의 기부 행렬은 세습이 아닌 혁신으로 스스로 부를 만들고 이를 다시 사회에 환원하면서 새로운 혁신을 창출하는데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며 "후세에 부를 대물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신 새로운 도전자가 나오게 사회를 혁신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대단히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기존의 재벌들이 세습을 위해 기업을 능력이 아닌 지분으로 통제하려고 무리수를 두다 대부분 범법자가 되는데 이제 재벌 3,4세도 본인의 능력에 따라 평가받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며 "지분에 의해서 통제하는 방식은 더이상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