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겪은 이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 채 어둑한 감정에 갇힌다. 그리고 스스로 생채기를 낸다. 그런 상처받은 이들을 향해 내면을 끌어올려 다시 마주하고 넘어서자 말하는, 영화 '빛과 철'은 그런 영화다.
하나의 교통사고로 두 여자는 남편을 잃었다. 희주(김시은)의 남편은 죽었다. 영남(염혜란)의 남편은 살아있지만 2년째 의식불명이다.
사고로부터 2년 후 고향으로 돌아온 희주는 우연히 영남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은 가해자고 영남은 피해자라는 생각에 희주는 괴롭기만 하다. 여기에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까지 자신의 주위를 맴돈다.
죄책감과 이명에 시달리던 희주는 은영의 말 한마디로 어쩌면 자신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희주는 2년 전 교통사고를 다시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희주와 영남이 각자 애써 억눌러온 감정은 하나둘 밖으로 삐져나오고, 둘의 감정들은 격렬하게 부딪혀 나간다.
카메라는 교통사고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각자 위치에 놓인 두 여자 희주와 영남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뒤쫓는다. 두 인물과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과정은 스릴러 형식을 이용한다.
영화는 그동안 가해자로 알았던 희주의 남편이 어쩌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툭 던져 놓는다. 이를 기점으로 무언가 비밀을 감춘 것 같은 인물들을 하나씩 보이며 의심하게끔 만든다. 정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사건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주변 인물들의 비밀은 사실 희주와 영남의 상처와 내면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다. 영남과 희주를 각기 따라가며 그들의 복합적인 내면과 숨겨둔 진실들이 차츰 드러나고 쌓이면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감정을 만날 수 있다.
가해자라는 죄책감, 피해자라 불리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감춘 자의 죄책감이 뒤섞여 인물들을 괴롭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지 않고,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는다.
가해자,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후 표피적으로만 다가간 채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희주와 영남, 은영의 깊숙한 아픔을 되돌아본다. 한 번도 제대로 꺼내지 않았던 아픔은 희주와 영남이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운 채 부딪히고 또 부딪히게 만든다.
또한 사고의 진실을 좇는 과정에서 영남과 희주는 자신들이 몰랐던 혹은 외면한 남편과 주변 사람의 상처를 깨닫게 된다. 이를 깨닫는 과정은 지독히도 아프고 다시 한번 자신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하다. 여기서 이전과는 다른 죄책감이 내면을 강타한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영남과 희주의 감정은 둘이 함께 차를 타고 영남의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도중 등장한 고라니로 인해 멈추게 된다. 고라니를 마주한 영남과 희주는 서로를 돌아본다. 대척점에 놓여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둘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 일종의 동질감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둘은 맹목적이던 시야에서 벗어난다.
내내 인물들을 뒤따르던 카메라가 때때로 시야를 넓혀 하청과 산업재해 등 사회의 그림자를 비추는 점 역시 '빛과 철'이 가진 장점 중 하나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 이어지는 영화인 만큼 배우들 연기 또한 영화의 중요한 중심축이다. 염혜란, 김시은, 박지후의 연기는 관객들을 스크린으로 몰입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염혜란은 서늘한 표정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뒤로 비밀을 삼킨 채 가족을 지켜나가는 영남을 단단하게 그려냈다. 염혜란은 '빛과 철로' 생애 처음으로 영화제에서 배우상을 받았다.
남편의 죽음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짓눌려 있다가 영남과 강렬하게 감정을 맞부딪힌 희주를 연기한 김시은 역시 스크린을 강렬하게 채운다. 아빠의 사고를, 희주의 상처를 자기 탓이라 여기며 괴로워한 은영을 깊이 있게 그려낸 박지후는 이번 영화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배종대 감독은 첫 장편인 '빛과 철'을 통해 어둡고 깊은 감정들을 하나씩 끌어내 마주하는 과정을 미스터리하면서도 스릴러의 방식으로 풀어내며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동시에 사회의 이면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그가 보여줄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107분 상영, 2월 18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