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문제제기는 북한의 원전건설 능력과 의지, 준비과정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이후 정부가 북한 원전 건설지원 방안을 검토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만 골몰했다.
따라서 대북 원전 건설 지원을 위한 선결조건, 즉 북미 비핵화 협상 종결, 유엔 대북제재 해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의 세이프가드 협정 체결, 북미 원자력협정 체결 등이 선행되지 않는 한, 북한 원전건설 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정부의 설명 앞에 야당의 의혹 제기는 설득력을 잃었다.
◇野 대북원전지원 논란…정치 공세 성격 강해
그러나 해프닝으로 끝난 북한 원전문제는 향후 핵잠수함 개발 문제 등과 결부되어 매우 중요한 이슈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 김정은 당 총비서는 지난 달 8차 당 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자립경제의 기본 동력인 전력 생산" 문제와 관련해 "중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조·수력 발전소 건설에 국가적 힘을 집중하며 핵 동력 공업 창설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계획들"을 언급한 바 있다.
◇핵동력 공업 진입계획…北 5개년 경제계획에 포함
김 총비서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대신 핵 동력 공업이라고 범위를 넓혀 표현한 것은 원전 건설을 아우르는 좀 더 광의적인 공업 창설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국내 원전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의 상업용 원전 건설과 가동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상업용 원전 건설비용이 수조원대로 워낙 많이 들어가고 북한의 열악한 송전 시설 등 전력 인프라를 감안할 때 원전을 지어도 수용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 원전전문가, 北의 상업용 원전 건설·가동 능력에 부정적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입장을 달리한다. 각 나라의 공업 구조에 따라 원전 건설비용과 경제성을 달리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미사일을 이미 개발한 북한으로서는 산업시설과 연구시설, 인력 등 핵전력을 개발·유지하는 인프라를 원전 건설에 활용하고 공유할 경우 원전 투자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北 핵 인프라 활용 시 핵 동력 공업 비용 절감 가능
안진수 전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책임연구원은 "북한이 핵·미사일 전력의 생산·보수·유지를 위해서는 어차피 이에 대한 시설과 인력 등 핵 인프라를 유지해야하는데, 이 인프라를 상업용 원전 건설과 가동에 활용할 경우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순수하게 상업용 원전만 단독으로 건설 운용할 때의 경제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 총비서가 8차 당 대회에서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가 끝나 최종 심사 단계에 있다"며 핵잠수함 추진 방침을 공개한 것도 원전 등 핵 동력 공업 창설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경수로 원전과 핵잠수함 기술 상당부분 유사
안진수 전 연구원은 "경수로 원전은 핵잠수함의 엔진기술에서 시작했다"며,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확보한 북한이 핵잠수함 개발을 추진한다고 할 때, 핵잠수함 개발에 들어가는 설계 기술과 인력 등 상당 부분을 경수로 원전에 활용해 비용을 줄 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지난 2010년 이후 영변에 지은 소규모 실험용 경수로가 완공되지는 못했지만, 핵잠수함과 경수로 원전으로 확대해나가는 핵 동력 공업 창설 준비의 일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국방연구원 북한군사연구실은 최근 '북한 8차 당 대회 분석과 안보 외교 분야 함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경수로 건설 및 농축 우라늄 제조 기술을 고려할 때 핵잠수함 원자로 설계와 연료 제조 능력을 일정수준 확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국제적 수준의 첨단장비기술을 구현하지 않더라도 전력화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을 것"이라고 관측한 바 있다.
북한은 이미 12년 전에 '핵 동력 공업'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 비난하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오자 북한은 같은 달 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6자회담 불참과 플루토늄 재처리 등 합의 사항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우주조약을 비롯한 국제법에 근거해 자주적인 우주이용 권리를 계속 행사해 나갈 것"이고, "주체적인 핵 동력 공업 구조를 완비하기 위하여 자체의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 등 핵 동력 공업도 핵·미사일 개발 경로 가능성
북한은 이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임기 초반인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돌이키기 어려운 핵전략 강화의 길로 들어섰다.
북한은 결국 은하 2호와 광명성 2호 발사 후 8년 뒤인 2017년 11월 30일 화성15형 ICBM 시험 발사로 핵 무력 완성 선언을 했다.
이런 경로가 원전과 핵잠수함 등 핵동력 공업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핵실험 성공 뒤 자체의 지정학적·전략적 입지를 매개로 한 미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체제 밖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더 나아가 원전까지 확보한 사례도 있다.
북한이 경제성이 떨어지는 초보적 원전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자체 원전건설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 최근 국내 정치권을 달궜던 대북 원전 지원 논란은 그야말로 공허해진다.
◇전문가 "경수로 원전 본격 개발 메시지, 평화프로세스 재가동 중요"
북한이 핵잠수함과 원전에 대한 전망을 갖고 있다면, 북한 비핵화의 문턱은 더욱 높아질 공산이 크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북한의 핵 동력 공업 언급이 그동안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 원칙적 수준이었다면, 이번 8차 당 대회에서는 경수로 원전 건설을 본격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실험용 경수로 운영 경험이 핵잠수함 추진 계획의 기술적인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사정이 이렇다면 좌초 위기에 처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되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