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공화당으로 추정되는 괴한이 신민당에서 선거 홍보 활동을 하던 오빠를 무참하게 때렸어요. 직접 경찰에 신고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일 전주시청에서 만난 한루비(53)씨에는 두 오빠의 한이 담겨 있었다. 한종호가 죽었을 당시 두 살인 한루비씨가 범행 현장에 있었던 누나로부터 오빠의 이야기를 들은 건 2년 전이었다
당시 21살이던 한종호의 누나이자 목격자 한남례(72)씨가 말했다.
"'마을 사람이 큰일 났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면서 막 달려가니 괴한이 도망을 가면서 얼굴을 못 봤어요. 3명도 더 된 것 같은데… 벽돌로 머리를 친 기억이 있어요. 마침 벽돌 공장이 있었거든요."
유가족의 말을 정리하면, 한종호는 전주 숭실고등공민학교(과거 금암고등학교)를 다니던 1971년 4월 29일 저녁 9시쯤 전주 서학동의 공수내다리 아래에서 괴한 3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1971년 4월 27일은 제7대 대선이었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나왔다. 유가족은 괴한의 정확한 신원은 알 수 없으나 민주공화당 소속의 조직폭력배로 추정하고 있다.
내려친 벽돌로 심하게 다친 한종호는 전주 성모병원에 입원했지만 뇌에 염증이 심각해 수술은 늦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퇴원 뒤 22일 만에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한종호는 당시 전주 서학동 파출소에 신고했고 입원 도중엔 폭행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협박을 괴한들로부터 받았다는 게 유가족들의 말이다. 시민당 소속인 김대중 후보의 홍보 활동을 맡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종호가 죽기 전 부모에게 공화당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이듬해인 1972년 유신 헌법으로 독재가 시작됐다. 시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병문안만 왔을 뿐, 진상 규명엔 소극적이었다.
그렇게, 한종호가 눈을 감았다.
1974년 겨울에는 한종호의 동생 한보만이 임실군 옥정호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한보만은 당시 전주 영생고등학교 2학년으로 재학 중인 18살 청춘이었다. 신민당 정치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한보만의 죽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없다.
두 청년의 꿈과 청춘이 꽃을 피우지 못했고, 한루비씨는 가족사진에서 낯선 피붙이를 발견했다.
"1999년 간암 말기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안 시골집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어요. 가족사진에서 두 오빠의 얼굴을 처음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죠. 그때 부모님이 오빠의 폭행 사건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한루비씨는 부모에게서 들은 두 오빠의 이야기를 짚어보며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손을 내밀었다. 과거사정리법이 지난해 6월 개정되면서 지난해 12월 1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출범했다.
대전 국가기록원에서도 수사 기록을 찾지 못한 유가족은 한종호·한보만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애타게 찾고 있다.
"최근 전국에서 이와 유사한 20여 건의 재판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종호·한보만의 학교 동문, 신민당 당원 가운데 사건의 진실을 알고 계신다면 연락을 주기를 간곡히 간청드립니다. 아울러 70년도 초반에 정치적인 이유로 고인과 같이 유사한 피해와 고통을 입은 분들이 있다면 역시 연락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