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공조를 강조하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맞아 선제적인 '성의 표시'로 미국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고육책이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강경했던 대일 정책기조를 갑자기 바꾸고 그럼에도 별다른 배경 설명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의심과 비판은 불가피하다.
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공식성을 인정한 대목에선 박근혜 정부의 '적폐'와 다를 게 뭐냐는 이율배반에 대한 실망감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갑작스런 기조 변화에 '외교적 알리바이' 관측…긴 맥락에서 볼 필요
하지만 정부의 대일 기조 변화는 보다 긴 호흡에서 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수탈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과거사와 경제·안보를 분리하는 투트랙(two-track) 대응을 외교 지혜로 활용해왔다.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나 독도, 교과서 문제 등은 양국의 근본적 입장차를 감안해 천천히 풀고 경제와 안보상의 가능한 협력부터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고 '천황 사죄' 발언으로 일본을 자극할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러나 이듬해 집권한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한일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못 박는 원트랙(one-track)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혔다.
그는 그해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외통수 외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협상의 졸속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한미일 삼각공조를 중시하는 당시 오바마 정부의 강력한 압박이 있었고 그 앞에서 한국은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대일 외교의 투트랙 복원을 꾸준히 시도해왔고 최근의 유화책 역시 그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
실제로 정부는 계기마다 투트랙 기조를 강조하며 원트랙 '함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왔다. 다만 '한국 때리기'로 일관했던 아베 총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부득불 강경 이미지가 덧칠됐을 뿐이다.
정부는 결국 지난해 9월에서야 아베 총리의 실각으로 기회를 잡았고 후임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는 더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지난해 11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 잇달아 일본을 방문했고, 새해 들어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이어 강창일 신임 주일대사의 '천황 폐하' 발언까지 나왔다.
이는 4월 서울·부산시장 선거를 앞둔 지지층 민심을 고려할 때 단기적 상황 관리 차원이라면 하기 힘든 선택이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내정치적 불리함이 다소 있더라도 일본과의 화해라는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인 것이다.
임기가 사실상 1년도 남지 않은 가운데 최대 외교 과업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미국의 정권 교체로 인해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어서다.
이런 판국에 한일관계 개선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특성상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더 긴요해졌다.
과거 볼턴 회고록에서도 드러났듯 일본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훼방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새 한미일 체제에선 일본의 협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립화 시켜야 활로가 열린다.
남창희 인하대 교수는 "바이든 정부가 한일관계가 협력 마비 상태인 것에 상당히 불만을 갖고 있어서 미리 조응하려는 시그널을 보내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의 불협화음을 사전에 줄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기조 변화에도 일본이 화답해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지배적 전망이다.
문 대통령이 법원 판결에 '곤혹스러운' 심정까지 밝히며 양보했음에도 일본은 여전히 냉랭하고 차제에 한국을 굴복시키려는 의도마저 감지된다.
설령 실용주의적 측면이 있는 스가 총리가 정치적 타협에 나서려 해도 지지율이 30%대로 급락하며 중도하차 이야기가 나오는 등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든 상태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스가 총리로선 북한과의 납치 문제나 한일관계 극적 타개 외에 외교 성과를 거둘 게 없기 때문에 한국의 태도 변화가 분명 유인책이 될 수는 있다"면서도 "안타깝게도 우리가 구체적 해법까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물론 외교 협상에서 일방적 양보는 있을 수 없고 합의를 이루려면 양 손뼉이 마주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가 23일 담화에서 우리 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에 대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완강한 입장을 고수한 것은 향후 전망을 어둡게 한다.
바이든 집권에 따른 새 한미일 체제가 일본에 훨씬 더 유리한 구도가 될 것으로 보고 벌써부터 고자세를 취한 셈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그랬듯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거짓 프레임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한국의 지속적인 러브콜과 상반된 일본의 냉담한 반응을 감안하면 명분싸움에서 누가 위에 설지는 알 수 없다. 관계 악화의 더 큰 책임이 일본에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투트랙 복원을 외치는 반면 일본이 오히려 원트랙으로 퇴행한 것은 '심판'인 미국이 보기에 일본에 감점 요인일 수 있다.
다만 정부가 '외교적 해법'과 '피해자 동의'를 동시에 만족시킬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일본의 역공을 맞게 된다. 한국의 기조 변화는 역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는 또 다른 프레임이다.
최봉태 변호사(대한변협 일제피해자 인권특별위원장)는 "외교부나 여성가족부나 만나자는 연락이 없었다. 정부가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이 신년회견에서 피해자 동의와 설득을 포함한 전향적 입장을 밝혔음에도 이를 뒷받침하려는 정부의 후속조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