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박원순 성희롱' 인정…"성적 굴욕·혐오감 느끼게 해"

5개월여 조사 끝에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묵인·방조는 확인 못해…다만 '성인지 감수성' 지적
인권위 "성희롱 보는 관점, 위계구조 문제로 봐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한형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성희롱 사건을 5개월여 조사한 끝에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5일 인권위는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업무와 관련하여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며 "서울시 등 관계기관에 피해자 보호 및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권고 등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은 업무·고용·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즉 인권위가 언급한 '성희롱'에는 위력에 의한 성추행·성폭력·강제추행·성적 괴롭힘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주장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했다. 서울시청 시장실·비서실 현장조사를 비롯해 피해자 면담조사 2회, 총 51명에 달하는 서울시 전·현직 직원 및 지인에 대한 참고인 조사, 서울시·경찰·검찰·청와대·여가부가 제출한 자료 분석, 피해자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 감정 등을 종합해 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인권위는 설명했다.

인권위는 "박 시장이 늦은 밤 시간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 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며 "이와 같은 박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피해자의 주장 외에 행위 발생 당시 이를 들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이 부재하거나 휴대전화 메시지 등 입증 자료가 없는 경우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는 피조사자의 진술을 청취하기 어렵고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반적 성희롱 사건보다 사실 관계를 좀 더 엄격하게 인정한 데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럼에도 성희롱의 인정 여부는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업무관련성 및 성적 언동이 있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며 "이 사건의 경우 위 인정사실만으로도 성희롱으로 판단하게 충분하다고 봤다"고 강조했다.

서울시 관계자들의 '성희롱 묵인·방조'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묵인·방조를 위해서는 이들이 박 전 시장의 성희롱 행위를 인지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하는데, 이런 정황은 객관적 증거 등을 통해 파악되지 않았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원들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전원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다만 인권위는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 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불어 박 전 시장에게 피소사실이 유출된 경위에 대해서는 "경찰청, 검찰청, 청와대 등 관계기관은 수사 중이거나 보안 등을 이유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박 시장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결과는 입수하지 못했으며 유력한 참고인들 또한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하지 않는 등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며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서울시의 비서 운용 관행도 비판했다. 인권위는 "피해자는 시장의 일정 관리 및 하루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하는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명절 장보기 등 사적영역에 대한 노무까지 수행했다"며 "업무를 수행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친밀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공적관계가 아닌 사적관계의 친밀함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서실 직원들이 박 시장과 피해자를 '각별한 사이'나 '친밀한 관계'로 인지하면서 이를 '문제'로 바라보지 못했다"며 "피해자 또한 비서 재직 당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노동을 수행한 것도 그것이 비서 업무로 정당화 돼 문제의 본질이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시는 시장 비서실 데스크 비서에 20~30대 신입 여성 직원을 배치해왔다. 이는 비서 직무는 젊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고정관념, 즉 시장실 비서는 '서울시의 얼굴'이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등 타인을 챙기고 보살피는 돌봄노동·감정노동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인식과 관행이 반영된 결과"라고 비판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아울러 인권위는 서울시장과 같이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이 성희롱 가해자일 경우 이를 감독할 상급기관이 없는 점에 대해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봤다. 또한 직장내 성희롱 2차 피해 예방을 위해 관련규정을 정비하고 매뉴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냈다.

인권위는 "박 시장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교수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여성 인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공동변호인단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젠더정책을 실천하려 했기에 그의 피소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며 "그 충격만큼이나 성희롱을 법적으로 규제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직장내 성희롱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오히려 2차 피해가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성희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에서 '고용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거부의 표시' 여부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로, '친밀성의 정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인지 여부로, '피해자-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문화나 위계구조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피해자 측은 지난해 7월 22일 인권위에 8가지 사안에 대한 직권조사를 요청한 바 있다. 요청안에 적시된 요구사항에는 '박 전 시장의 성희롱 및 강제추행 등 성적괴롭힘으로 인한 피해의 정도' 등 성추행 의혹 자체에 대한 조사와 '서울시 및 관계자들의 직장 내 성희롱·성범죄 피해에 관한 방조', '고소사실이 박 전 시장에게 누설된 경위' 등이 포함됐다.

더불어 △서울시 및 관계자들의 성차별적 직원 채용 및 성차별적 업무강요 △직장내 성폭력, 성희롱 피해에 대한 미흡한 피해구제절차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적극적 조치 이행 여부 △선출직공무원 성폭력에 대한 징계조치 등 제도적 견제장치 마련요청 △직장내 성폭력예방교육의무의 이행 여부 등 제도 개선을 위한 폭 넓은 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7월 30일부터 별도의 직권조사팀을 꾸려 조사에 착수한 인권위는 5개월 간 조사를 진행했고, 이날 전원위원회 심의·의결을 진행했다. 전원위는 인권위원장을 포함한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지만 이날은 9명의 위원만 참석했고, 재적 위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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