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 김미향씨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4일 오전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김씨의 쌍둥이 자매 나원이와 다원이는 생후 3개월 무렵인 2012년 초 '가습기 메이트'를 사용했다. 언니 나원이는 돌이 지나자마자 폐 섬유화 진단을 받았고 목에 구멍을 내 연결한 튜브로 숨을 쉬어왔다. 동생 다원이는 생후 6개월에 기흉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들, 이마트 관계자 등에 대한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메이트 제품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CMIT·MIT 단독 및 복합 사용 피해자들이 나와 피해를 호소했다. 피해자들은 재판부의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 있는 내 몸이 증거"라며 울분을 토했다.
김씨는 "재판부가 기업이 사과를 못 하도록 만들어놨다. 제가 아이들에게 엄마가 미안하다고는 하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다"며 "그 당시 과학 근거가 미비했던 '옥시'도 혼이 났는데 'SK'는 무죄라고 한다"고 답답해했다.
그러면서 "재판부에게 한 번 더 부탁한다. 국민 중 집에서 치약, 세제, 샴푸 등 화학 약품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며 "이번에는 저와 제 아이들이 피해자였을 뿐이다. 언제 누가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부디 심혈을 기울여 2심 처분은 잘 해주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출산 한달 전부터 가습기메이트 한 통을 구입해 약 80% 가량을 사용했다는 피해자 손수연씨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이들이다. 나원이를 비롯해 몇몇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폐섬유화를 겪었다"며 "이것만큼 정확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현장에는 2007년 CMIT·MIT로 만든 이마트 가습기살균제 PB 상품을 쓴 후 폐가 망가져 13년에 걸친 투병 생활을 한 아내를 둔 김태종씨도 참가했다. 그의 아내는 지난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부위원장을 최근 사퇴한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2016년 이후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는 세상에서 잊혀져가고 있다"며 "지난해 말 국회가 사참위법을 개정하면서 사참위 활동을 연장했지만 가습기 진상규명 파트는 삭제했다. 이는 가습기 참사를 사실상 잊고 있는 우리사회 세태의 반영"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공판은 2년이나 지속됐는데 검찰 측 요청으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법정에 나와 CMIT·MIT의 유해성을 증언했다. 그런데 하나도 채택이 되지 않았다"며 "이번 판결로 옥시싹싹에 사용된 PHMG는 영향이 있고 CMIT·MIT는 영향이 없다는 셈이 됐다. 건강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피해자들은 더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