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기]이루다가 소환한 '알페스' 진짜 성착취 맞나요?

AI 이루다 성착취 논란에 '알페스'로 맞불…'처벌 촉구' 청원 14만 돌파
20년 이어진 '알페스'는 팬덤 하위 문화…기획사들 마케팅 활용하기도
'팬픽'에서 확장된 '알페스' 개념, 최근에는 '가상 연애식' 소비 늘어
실제 성범죄로 발전할 확률 현저히 낮아…여전히 팬들 문화 영역
문화평론가 "성착취는 권력 구조 통해 지배…성노예화 추구하는 것"
"'알페스'는 지배와 굴복이 아니라 숭배와 선망이 근간"
문화연구자 "n번방 때부터 '알페스'는 본질 가리고 성대결 부추기는 단골 소재"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와 콘서트에 모인 아이돌 팬들. 팬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이루다 홈페이지 캡처, 박종민 기자
인공지능(AI) 이루다로 촉발된 성착취 논란이 아이돌 '알페스'로까지 옮겨 붙었다.

20대 여성으로 설정된 AI 이루다 성착취를 비판한 주체가 주로 여성이었다면 이번엔 남성들이 한데 뭉쳤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알페스 이용자 처벌' 청원은 일부 남성 연예인들과 남초 커뮤니티의 독려 속에 12일 오후 8시 30분 기준 벌써 14만 건의 동의를 얻었다. AI 성착취에 '알페스'로 맞불을 놓으면서 결국 극단적 성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아이돌 그룹 팬덤 내 하위 문화 중 하나인 '알페스'(Real Person Slash·실존 인물을 커플처럼 엮는 행위)는 이미 1990년대 말 아이돌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생겨났다. 당시에는 이를 '알페스'라 부르지 않았고, 팬덤 내 콘텐츠로 대표되던 '팬픽'(팬이 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창작한 글) 문화로 통칭됐다.

그 수위는 다양했지만 소비 방식은 지금보다 훨씬 공개적이었다. 팬들뿐 아니라 아이돌 멤버 당사자 역시 언급에 거리낌이 없었고, 1~2세대 아이돌 그룹까지는 기획사들에서도 팬들의 기호를 반영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팬픽' 문화 역시 다변화됐고, 아이돌의 이미지나 캐릭터성을 차용하지만 실존 인물이기에 상당수 많은 부분이 음지화됐다. '팬픽' 문화에서 확장된 '알페스' 개념은 단순히 팬들이 글로 창작한 콘텐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팬픽'뿐아니라 1차 콘텐츠를 '알페스식' 혹은 '가상 연애식'으로 재해석하는 영상, 글 등 모든 파생 콘텐츠들이 포함된다.

최근 급부상한 '가상 연애식' 소비는 나와 스타를 엮으면서 로맨틱한 설렘을 느끼는 방식이다. 2차 콘텐츠 창작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수위는 각양각색이다. 과거 '알페스'에 그랬듯이 최근 기획사들은 이에 발맞춰 스타와 팬 사이 일 대 일 소통 콘텐츠를 추구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아이돌 팬덤 문화는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여 왔다. 아이돌은 무대 안팎 이미지를 제공할 뿐, 이를 취사 선택해 향유하는 방식은 팬들마다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K팝 팬덤의 발전에 이런 하위 문화를 통한 팬 유입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체로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 과정에서 도 넘은 성적 대상화가 이뤄질 경우 내부 자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것이 실제 멤버가 겪는 '성범죄'로 이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 기획사들이 악성 댓글, 딥페이크 합성 등에는 강경 대처하지만 '알페스'는 팬들 영역으로 남겨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에 제기된 논란처럼 일부 팬들이 아이돌 멤버의 성적 부분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소비하는 양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AI 이루다에게 벌어진 '성착취'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성착취'란 단순 성적 대상화나 소비가 아니라 '착취'가 가능한 권력 구조 속에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황진미 문화평론가는 "성착취는 '성적 지배' 개념이다. 즉, 권력을 통해 상대의 자기 의지를 박탈하고 굴복시켜 성적 쾌감보다는 지배하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알페스'가 과연 이런 권력 구조 아래 이뤄지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루다와 n번방 사건에서 성착취가 성립되는 건 취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성적 지배 망상을 충족시키는, 소위 '성노예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자기 의지를 박탈하고 굴복시키고 지배하겠다는 의도로 이 같은 하위 문화를 만들고, 거기서 쾌감을 느끼나? 그렇다기 보다는 오히려 대상에 대한 숭배와 경외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가깝다. 마치 신화처럼 자신이 선망하는 존재들끼리 묶어 상상하는 형태"라며 "이루다나 n번방 성착취와 이를 동일선상에 두는 건 성적 지배와 관련된 사회구조적 권력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본다"고 짚었다.

'알페스' 논란 자체가 성대결을 부추기려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진정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인권을 우려했다기보다는 남성 위주의 '성착취'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여성 쪽을 공격하는 '방패막이'나 '빌미'로 쓰인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성년자·여성을 대상으로 일어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당시에도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주도하는 '팬픽' 문화가 성착취나 다름없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중대한 성범죄에 '팬픽'을 비교해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는 비판만 속출했다. '팬픽'은 실제 성범죄로 연결되지 않는 반면 여자 아이돌들은 불법 촬영, 딥페이크 합성 등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겪고 있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이번에는 가상인물인 AI 성착취보다 실존 인물 대상인 '알페스'가 더 심각하다는 논리를 폈지만, 이 역시 성대결로 귀결돼 AI 성착취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성차별, 편견 등의 문제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진단이 나온다.

팬덤 문화를 연구해 온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알페스'는 실재와 가상이 섞인 세계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쓰지만 엄연히 허구이며, 그 캐릭터적 특성이 묻어 있어 좋아하는 것"이라며 "당연히 시대 의식 변화에 따라 보완할 지점도 있겠지만 이번 논란은 극단적 사례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강하고, 여자 아이돌들이 '딥페이크' 합성 등 시각적으로 성적 대상화돼 소비되는 '또 다른 극단'을 생각하면 차이가 크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왜 이 시점에 갑자기 '알페스'가 소환됐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사법부 판단을 요구하고 범죄 영역으로 명시하려는 양태 자체가 성대결을 부추기는 것이다. n번방 이후부터 '알페스'는 '상상 속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단골 소재가 됐다. 본질을 잊어버린 채 '너네도 그랬지' 식의 문제 사례를 수집해 대결만 하는 건 원점에서만 맴돌 뿐 어떤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다시, 보기'는 CBS노컷뉴스 문화·연예 기자들이 이슈에 한 걸음 더 다가가 현상 너머 본질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발빠른 미리 보기만큼이나, 놓치고 지나친 것들을 돌아보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간절한 요청입니다. '다시, 보기'에 담긴 쉼표의 가치를 잊지 않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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