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정곤 부장판사)는 8일 오전 고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피해자들이 우리나라 법원에 낸 손해배상 소송 가운데 첫 결론이다. 판단 근거로 일본 정부의 불법행위가 인정될 뿐 아니라 '국가면제' 원칙도 이 사건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모든 주권국가가 평등하다는 전제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자국의 국내법을 적용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원칙을 뜻한다. 일본 정부는 해당 원칙에 따라 이 소송이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고,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 참석도 거부해 왔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서 피고가 직접 주장하지는 않지만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2015년 위안부 관련 합의 대상 등 내용에 손해배상 청구권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에 따라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국가면제에 대해 이것이 각 나라들의 주권을 존중하기 위한 개념이긴 하지만,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해 큰 손해를 입힌 국가가 이것 뒤에 숨어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형성된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일본의 행각이 국가 차원에서 자행된 끔찍한 만행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쿄 재판에서 처벌하기로 정한 '인도에 반한 범죄'이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판결에 매우 유감으로,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재판권에 복종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1심에서 패소한 이번 판결에 항소할 생각이 없다고도 말했다. 또다른 외교적 보복의 가능성을 내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앞서 지난 2018년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이듬해 수출규제로 보복에 나서자 우리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로 대응에 나섰고, 현재는 일단 조건부 효력 정지로 보류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징용 판결로 인해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현금화될 경우에는 추가 보복 조치를 하겠다고 예고했으며 수출규제도 아직 풀지 않았다.
이번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판결은 일본 정부가 항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등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해 스가 요시히데 총리를 만나는 등 한일관계 봉합에 애썼지만, 또다시 외교 보복이 자행된다면 양국 관계가 크게 악화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2015년 12월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며 "판결이 외교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일 양국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계속될 수 있도록 제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2015년 위안부 합의에서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가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를 포함해 여러 독소조항으로 굴욕적인 협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지만, 합의 자체가 파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의식한 언급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한일관계는 반인륜적 범죄에 국가면제가 성립할 수 있느냐는 국제법적 문제와 함께, 이미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의 효력과 더불어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문제까지 얽힌 복잡한 실타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