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민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비극은 권력의 폭력 탓에 일어난다. 이를 덮는 것은 역시 권력과 이에 동조한 이들이다. 영화 '미스터 존스'는 이러한 참극에 대한 회고이자 국가와 권력, 그리고 언론이 자행한 폭력에 대한 반성이다.
1930년대 초 런던, 히틀러와 인터뷰한 최초의 외신기자 가레스 존스는 전도유망한 언론인이다. 그는 '유토피아' '혁명'을 선전하는 스탈린 정권의 막대한 자금 출처에 대한 의혹을 품고 스탈린을 인터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존스는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인 월터 듀란티를 만나 협조를 청하지만 듀란티는 이미 현실과 타협한 지 오래다. 그러나 존스는 포기하지 않고 작은 실마리를 따라 위협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그곳에서 존스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혁명'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미스터 존스'는 세상이 외면한 진실을 끝까지 추구한 단 한 명의 기자, 스탈린의 압제를 폭로한 첫 번째 기자 가레스 존스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존스가 세기의 곡창지대로 불린 우크라이나에서 본 풍경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스탈린 치하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기근으로 수백만명이 기아로 죽어갔다. 이른바 '홀로도모르(Holodomor·기아로 인한 치사)'다.
영화는 존스의 여정을 따라 묵묵히 카메라를 옮긴다. 그가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길부터 시작되는 흑백 영상은 1930년대 스탈린의 폭력으로 인해 기근을 견뎌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한 솔직한 기록과도 같다.
혹독한 추위와 그보다 더 냉혹한 인위적인 기근 앞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쓰러져 간다. 심지어 죽은 형제의 시신을 먹어가며 연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스탈린 정권은 아무 문제 없이 성공적으로 혁명이 이뤄지고 있다고 선전한다. 그 뒤로는 죽어가는 시민들을 철저하게 착취하고 또 착취한다.
흑백 영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외면한 이들, 바로 모든 것을 잃은 채 희망의 빛마저 꺼져버린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가르는 경계처럼 놓여 있다. 동시에 참혹한 현실이자 과거의 비극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료처럼 말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영화적 표현 중 하나는 존스의 여정과 참상에 대한 폭로가 정치 우화 '동물농장'을 집필하는 조지 오웰의 모습과 교차하며 나타나는 지점이다. 존스가 바라본 진실과 이를 마주한 현실의 사람들 모습은 '동물농장'이 표현하는 풍자 그 자체라는 점에서 더욱 영화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국가 권력의 폭력과 거짓 선전, 이를 돕는 부패한 언론 권력이 대중의 눈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습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와 언론은 그 모습만 달리할 뿐, 권력의 폭력적인 이면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오가는 컬러와 흑백의 세상은 지금도 재현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주목하고자 하는 문제들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미스터 존스'는 이를 영화적인 해석과 표현으로 스크린 앞에 앉은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극장을 빠져나간 뒤 영화 속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현실에 관심 두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세상의 깊숙한 곳으로 눈을 돌릴지 말이다.
역사적 비극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노련한 거장인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만의 시선으로 스탈린 시대의 폭력을 그려냈다.
여기에 '작은 아씨들'의 제임스 노턴과 '그녀의 조각들'로 2020 베니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네사 커비, '언 애듀케이션' '재키'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약 중인 피터 사스가드가 펼치는 열연도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118분 상영, 1월 7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