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방송된 '아내의 맛'에는 나경원 전 의원과 그 가족이 출연해 일상을 공개했다. 방송은 나 전 의원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자녀를 챙기는 등 '소탈한 엄마'로 생활하는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어린 시절 사진과 함께 '성형설'을 해명하기도 했다.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 장관 역시 '아내의 맛' 출연을 앞두고 있다. '아내의 맛'은 같은 날 박영선 장관 부부의 출연 소식을 알리면서 "장관으로서가 아닌 아내로서의 삶을 보여주며 새롭고 친근한 면모를 선보인다"고 전했다. 나 전 의원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내'인 박 장관의 모습을 부각시키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여야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예능프로그램 출연 자체가 선거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은 6일 "'아내의 맛'은 선거출마 정치인 출연을 당장 중단하라"고 강력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민언련은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 선거 출마를 앞둔 정치인의 홍보방송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면서 "'아내의 맛'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이 평상시 정치인을 섭외한 것과 달리 선거 시기를 코앞에 두고 출연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청률을 위해 불과 3개월을 남겨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을 섭외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홍보된 정치인 모습이 선거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 말처럼 과거 당선된 정치인이 가족과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사례는 있었지만 유력 후보들이 선거를 앞두고 출연하는 경우는 드물다. 선거법 사각지대를 교묘히 이용한 출연이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현행법상 선거일 90일 전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구성되지만, 보궐선거는 예외적으로 60일 전 구성하도록 돼 있다. 이 30일 공백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아내의 맛' 출연도 불가능했다.
'아내의 맛'이 이들 정치인을 다룬 방식 역시 문제점으로 꼽힌다. 유권자 판단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나 공약, 신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관습적인 성역할이나 외모만을 부각시켜 소비했다는 것이다. 국회 내 여성 정치인 비율이 19%에 불과한 현실 속에서 결국 이들에게 씌워진 편견과 왜곡된 잣대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기본소득당 신지혜 서울시장 후보는 6일 SNS에 "여성 정치인이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로 불리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 정치인도 집에서는 한 명의 아내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면 심히 유감"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이어 나 전 의원과 박 장관에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성역할은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 불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때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일침을 놨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내세운 '화목한 정상 가족' 이미지를 두고는 "이제 정치인들이 몸소 예능에 출연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긍정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5일 방송된 '아내의 맛'은 두 배 가까이 시청률이 상승했다. 이전회 6.3%(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동일)까지 떨어졌던 시청률은 나 전 의원 가족 출연에 11.2%를 기록했다. 선거를 앞둔 유력 후보들의 '이미지 메이킹'과 방송사의 시청률 상승 전략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는 방송사가 가진 공적 책무를 저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성공회대 최진봉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6일 CBS노컷뉴스에 "선거는 인기투표가 아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검증돼야 하는데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지 정치가 돼버리면 유권자들의 올바른 선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결국 정치인은 철저히 준비해 이미지 메이킹하니 좋고, 방송사는 시청률 올라 좋으니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언련 관계자 역시 "한 정치인의 사생활과 개인적 이야기가 유권자 판단의 어떤 주요 요소가 되느냐"고 반문하면서 "이를 집중 부각시키는 행태는 시청률 올리기 수단임을 보여주고 있다. 방송은 대중의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들 위주로 다루고, 또 이에 대한 기사가 '미담식'으로 재생산되면서 정치인은 홍보가 되는 수순"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튜브 채널에도 정치인들 마음껏 나오는데 왜 안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유튜브는 어디까지나 개인 운영이고 시청자가 자기 선택 과정을 거친다. 자본금 3천억원을 들이고 허가를 거쳐 설립되는 채널이 아니다"라며 "아무리 플랫폼 다양화로 방송 영향력이 약해졌어도 방송은 이용자 선택 없이 노출되는 매체이고, 공적 역할과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은 잣대로 두고 볼 순 없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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