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시대 끝났다…"이제는 성·재생산권리 보장해야"

'낙태죄', 2019년 4월 헌재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효력 상실
대체입법 시한 지나…모자보건법 개정안 등 관련 논의 계속
전문가들 "성·재생산권 보장 차원에서 임신중단 문제 다뤄야"
"'생명권 vs 자기결정권' 대립구도 벗어나, '안전'한 임신중단 고민해야"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 기본법 제정 등 대안 제시
"표준진료 가이드라인, 건강보험 적용 등 의료체계 손질 필요"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신지혜 상임대표가 지난달 31일 국회 소통관에서 '낙태죄' 유통기한 만료를 환영하며 기자회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1월 1일 형법상 낙태죄는 효력을 잃었다. 제정된 지 67년 만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4월 11일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제1항(의사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임신중단을 '권리'로서 보장하기 위한 법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안전하게' 임신중단을 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됐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논의가 공전을 거듭하면서 헌재가 정한 개선입법 시한은 지난 31일 끝났고, 정부안과 의원 입법안 모두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조차 거치지 못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2020년까지는 처벌 규정을 없애는 것에 입법 활동이 집중됐다면, 올해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성·재생산 권리를 보장하는 개정안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낙태죄' 폐지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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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는 지난해 4월 △형법 제269조(낙태) 1항: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1항: '의사가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등의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음지에서 이뤄져 왔던 임신중지가 이제는 '의료 서비스' 영역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공적 지원체계는 준비돼있지 않다. 형법 개정안 논의가 부진하면서 모자보건법 개정안도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은 탓이다.

△임신중단 수술 등의 의료보험 적용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의료 가이드라인 △임신중단 약물 합법화 등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다.

임신주수·연령 등에 따라 임신중단 허용 여부를 달리할지를 두고도 각론이 펼쳐졌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달 28일 "아무 조건 없이 임신한 여성의 낙태는 임신 10주 미만에만 시행하겠다"며 '선별적' 낙태 거부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정혜 부연구위원은 "주된 당사자들이 2030 여성들임에도 그 집단은 논의에서 배제돼 왔다"며 "이제는 권리 보장을 위한 법안을 마련하고 의료계에서도 보다 활발히 논의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안전한' 임신중단 고민할 때"

지난해 10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정부의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안전하게 임신중단을 할 수 있도록 공적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재생산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임신중단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도 짚었다.

현실적 대안으로는 모자보건법 (일부) 개정 등이 제시되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 등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형법상 낙태죄가 무효화된 상황에서,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한 디테일들을 챙겨야 한다"며 "특히 입법적으로 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한 부분이 약물(유산유도제) 도입, 건강보험 적용 확대 등이다"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의료계가 보다 원활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지난달 30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주관으로 열린 ''낙태죄' 폐지 이후, 정책·입법과제 토론회'에서 △별도 플랫폼을 통한 임신중단 관련 정확한 정보 제공 △근거·국제 권고에 기반한 표준진료 가이드라인 수립 △유산유도약 도입 △임신중지·피임 등에 건강보험 적용 △보건 의료인 역량 강화 △상담 체계 구축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윤 전문의는 임신중지, 피임 등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지를 허용한 경우에는 급여화돼있지만, 너무 낮게 책정돼 있어 임신중지 시술을 할수록 병원은 손해를 본다. 합법적 임신중지를 거부하는 의료기관도 있다"며 "2017년 조사 결과 한해 임신중지는 5만여건으로 33억원 정도의 보건의료 예산이 필요하다. 1년 보건의료 예산은 90조인데, 수가 인상을 고려해도 사실상 큰 예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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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유도약이 온라인 등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는 것을 두고는 "WHO 필수의약품으로 등재돼 있는 약품들을 도입하면 더 이른 시기에 임신중지가 가능하고, 보건의료 비용도 절감한다"며 "지금이라도 쓸 수 있는 미소프로스톨에 대한 (허가)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전성과 접근성의 조화도 필요하다. 병원 내 처방, 산부인과 의사만 처방하도록 하면 접근성이 낮아 불법 암시장 이용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식약처는 "해외 제약사(수입사)가 신청하면 긴급하게 허가 절차를 개시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표준진료 가이드라인 등에 대한 연구용역을 산부인과학회에 의뢰했다. 1월 말까지를 연구 기간으로 정했다"며 "건강보험 적용 등 문제는 국회 논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성·재생산권'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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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단 관련 논의가 공전을 거듭해온 데에는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 대립 구도가 별다른 논증 없이 막연하게 수용돼온 영향이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저서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에서 임신중단 문제를 논하려면 '생명'과 '생명권'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이 소장은 헌재도 이 둘을 혼동했다고 짚었다. 헌재는 지난해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판결문에서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판시하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했다.

박이 소장은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로 가정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살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모자보건법은 유전적 질환, 장애 및 강간 등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 낙태를 허용해왔다. 헌재 낙태죄 합헌의견도 예외적 임신중단은 허용했으며,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쪽에서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아 왔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여성학과 김선혜 교수는 "태어나야 하는 생명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생명의 위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성·재생산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나아가 생애주기에 이뤄지는 재생산(피임·임신·임신중지·출산·폐경 등) 과정에서 안전과 존엄,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말한다. 차별·강제·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재생산 관련 결정을 할 권리를 아우른다. 국제사회는 이를 '인권'으로 확립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건물 밖에서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대가 상원이 임신 1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혜 연구위원은 "국제적 (추세)으로는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에서의 조화, 어떻게 이 둘을 보장할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임신중단 중에서 안전한 것의 비중을 높일 것인가'. 안전·비안전을 구분한다"며 "모든 사람이 권리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건강 관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모자보건법은 시민의 재생산 건강과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체계로 구성돼 있지 않다. 모자보건법 1조는 이 법의 목적에 대해 "모성 및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강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한다"고 규정한다. 헌법 36조2항은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개인에게 임신·출산을 장려하거나 억제하는 식이었다.

활동가·연구자·변호사·의사 등이 모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는 지난 10월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어 공개했다. 이들은 임신중지 문제가 '선택권' 문제인 동시에, 노동·교육 등 각 사회영역의 '사회 정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봤다.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달 2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정 장관은 "낙태를 법률로써 처벌하기보다는 여성의 건강권이라든지 재생산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소신"이라며 낙태죄 폐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기본법안은 성·재생산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 등을 규정했다. 아울러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정확한 보건의료 정보와 최신의 보건의료 서비스에의 접근 등을 보장하도록 했다.

임신중단 관련 개정안을 논의 중인 한 국회 관계자는 "우선적으로는 입법 활동을 통해 안전한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이 같은 작업들과 합리적인 토론을 거치다 보면 (임신중단 논의가) 우리에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성·재생산 권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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