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정동극장에서 개막한 '더 드레서'는 오랜 세월 무대를 지킨 노배우 '선생님'(Sir)과 16년간 그의 의상을 담당한 '노먼'을 축으로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영국 소도시의 한 극장이다. 공습경보가 발령된 일촉즉발 상황이지만, 지방 투어 중인 셰익스피어 극단은 '리어왕'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전란 속에서도 극장을 찾아준 관객을 실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공연 5분 전. 그런데 리어왕 역의 '선생님'이 좀 이상하다. 멀쩡히 외우던 대사를 까먹고, 정신도 오락가락한다. 과연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우여곡절에 끝에 리어왕 공연을 마친 선생님은 관객 앞에 서서 말한다. "극장을 찾아준 관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버티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쇼를 멈추지 않는 공연예술인과 2~3시간씩 마스크를 쓴 채 관람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관객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였다.
선생님의 소망은 좋은 배우로 기억되는 것이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를 마지막 무대로 이끈 건 관객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열망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거지. 나에 대해 잘 얘기해줘." 유언처럼 노먼에게 건넨 선생님의 한 마디가 남긴 울림은 깊다.
김종헌 예술감독은 "고령으로 인한 질병도, 참혹한 전쟁의 포화도 연극 무대를 향한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힘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에겐 관객이, 노먼에겐 선생님이 그 누군가이며 삶의 이유"라고 말했다.
더 드레서는 로날드 하우드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송승환이 직접 고른 작품이다.
9년 만에 연극에 복귀한 송승환은 최근 인터뷰에서 "무대·분장실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이야기인데다가 제 역할도 극단 대표 겸 배우라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2차 세계대전 한가운데 공연을 올린다는 설정이 코로나19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지금의 상황과도 흡사하다"고 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역임한 송승환은 이후 시력이 급격히 악화해 더 이상 글씨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각색 대본을 '더 드레서' 첫 미팅 때 다 외워 왔다고 한다. 송승환에게는 관객이 '누군가'이고, 연기가 '삶의 이유'인 것이다.
안재욱과 오만석이 '노먼' 역을 번갈아 맡는다. 2021년 1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