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핵심협약 비준 맞춰 노조법도 개정, 노조할 권리 확대된다지만…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동료들과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가 공을 들인 일이 바로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세우는 작업이었다.
노동시간 단축 농성투쟁, 임금인상 투쟁 등을 활발히 전개하던 청계피복노조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해산 됐지만, 이후에도 '법외노조'로서 다른 노조와의 연대 투쟁·민주화 투쟁에 활발히 참여한 끝에 1988년 서울의류노조로 부활했다.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기를 맞은 올해는, 이처럼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고 다른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에 관한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는 해이기도 하다.
우선 대법원은 지난 9월 지난 7년 동안 끌어왔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내려졌던 '법외노조' 처분에 대해 대법원이 위법한 조치라고 결론 내렸다.
더 나아가 최근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준비하기 위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노조할 권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정부안대로 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전교조의 법외노조 처분의 빌미가 됐던 실업자·해고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된다. 또 공무원의 경우 직급에 관계없이 노조에 가입할 수 있고, 소방공무원도 노조를 세울 수 있게 된다.
◇기약 없는 노조 설립 신고…노동부가 묵살하는 특고의 '노조할 권리'
정부는 이번 개정안 통과로 그동안 법외노조 논란을 빚었던 교원, 공무원이나 실업자, 해고자의 노조할 권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노조할 권리'의 가장 큰 구멍인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 이하 특고)의 노동 3권은 이번 법 개정에도 전혀 보호 받지 못하게 됐다.
현행 노동조합법은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 신고서만 제출하면, 노동부가 3일 안에 '합법노조'로 인정하는 노조필증을 교부하도록 하는 '신고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법 12조 3항의 '반려사유 조항'을 빌미로 정부는 다양한 이유를 들며 합법노조 인정을 거부하는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노동부는 지난 7월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의 설립을 신고한 지 428일 만에, 전국방과후강사노조는 신고 후 477일 만인 지난 9월에야 설립 필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특고 노동자들의 노조가 정부의 '허가'를 기다려야 하는 현실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9월 노조 설립을 신고한 보험설계사 노조는 아직도 1년 넘게 노동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또 기간제교사노조의 경우 2018년과 2019년에 이어 지난 9월 세번째로 설립신고서가 노동부로부터 반려됐다.
이에 대해 노동부 류경희 노사협력정책관은 최근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을 설명하면서 "현재 노동부는 실질적 심사가 아닌, 신고주의 취지에 맞는 형식적 심사를 하고 있다"며 "특고의 노조 설립 문제는 특고가 근로자 개념 범주에 포함되냐 아니냐의 문제다"라고 해명했다.
일반노동자처럼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특고의 경우 계약한 업체에서 업무지시를 받는 등 사실상 노동자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에 입증하지 못하면 '근로자'의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 설립에 실패해왔다.
하지만 이미 2018년 대법원은 특고를 노조법상 노동자로 인정했다. 이를 토대로 대리운전기사나 방과후강사 등이 노조 설립을 시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위의 사례에서 명확한 입장 표명도 없이 1년 이상 시간을 끌며 설립 필증 교부를 거부해왔다. 게다가 이번 법 개정안에서도 특고의 노동3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은 통째로 제외됐다.
◇"노동자가 만들면 그게 바로 노조…정부가 노조 권리행사 제약하면 안돼"
이와 관련해 노동계는 정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신고 필증 교부를 지연하지 못하도록 관계 법령이 개정하고, 노조법 상의 근로자 개념을 변화된 노동시장의 현실에 맞도록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정부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설립신고를 받지 못하거나, '법외노조'로 분류되면 단체교섭, 쟁의행위와 같은 노조 활동의 핵심적인 부분조차 불법행위로 처벌받도록 하는 노조법의 구조 자체가 노조 설립을 '허가제'로 운영하도록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김기덕 변호사는 "특고든 누구든 일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하면 노동조합을 만들면 되는데, 정부가 근로자 여부를 판단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 "라며 "더 나아가 정부가 받아준 합법노조가 아니면 사실상 노조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애초 노조법을 엄격하게 보면 노조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등 일부를 제외하면 법외노조의 권리도 보장해야 하는데, 정부가 교섭이나 파업쟁의처럼 노조에게 꼭 필요한 권리 행사 행위도 제한하고 있다"며 "노조의 권리를 자유롭게 열어놓고, 정부가 추가로 사용자로부터 노조를 보호한다는 개념으로 설립신고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김성희 소장은 "물론 복수노조가 도입되면서 과거 어용노조와 '달리기 시합'을 해서 설립신고를 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지금도 노동부가 특고의 노조 설립을 거부하고 있어 서울, 경기 등 지자체에 신청하거나 기존 직접고용노조를 이용하는 등 우회로를 통해 설립신고를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가 이미 신고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게 전향적으로 허용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며 "만약 특고의 특성으로 교섭대상인 사용자가 불분명하다는 등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노조가 해결할 문제일 뿐,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