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전태일 서거 50주기'를 맞아 지난달 22~2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이같이 발표했다.
직장갑질119는 현재 직장인들의 근로환경 및 인식 변화를 알아보고자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로 일했던 전 열사가 생전에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할 당시 사용했던 설문조항을 현대에 맞게 변용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정규직보다 열악한 처지에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느끼는 변화가 더 미미한 것으로 확인됐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귀하는 현재 직장의 고용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정규직의 67.7%가 안정적이라고 답한 반면 비정규직은 66.8%가 '불안정하다'고 응답했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조원(70.4%)과 공공기관(69.6%), 대기업(65%) 소속 근로자들은 해고나 실직의 위협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웠지만, '5인 미만'의 영세사업장(59%)과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직장인(50.6%)들은 이같은 불안을 더 높게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반응은 앞으로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앞으로 본인의 근로조건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정규직(56.3%) 및 공공기관(65.7%)·대기업(59.3%) 근로자들은 긍정적으로 응답한 데 반해 비정규직(54.5%)과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55.7%)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해 현격한 온도 차를 보였다.
전태일이 일하던 1970년대와 비교해 노동자들의 삶과 처우가 달라졌는지 묻는 문항에서도 정규직은 51.5%가 그렇다고 바라봤지만, 비정규직은 37.8%만이 '좋아졌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다.
설문 결과 직장인들의 한 달 평균 휴일이 8.25일로 산출된 가운데, '8일 미만'을 쉬고 근무한다는 응답은 비정규직이 28%로 정규직(21.3%)보다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복리후생이 비교적 잘 돼있는 공공기관은 7.8%만이 평균 휴일 일수를 보장받지 못했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같은 경우가 29%로 3.7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대부분의 응답자(94.9%)는 주말(토·일)을 포함해 법적 공휴일 등 달력상 '빨간 날'인 휴일마다 쉬기를 원한다고 답변해 현실과의 거리를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응답자들의 절반 이상(54.8%)은 원하는 날 쉬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회사 규칙이기 때문'(26.3%)이 꼽혔으며 △수당을 더 벌기 위해서(19.6%)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9.8%) 등이 뒤를 이었다.
다만, 남성·정규직·사무직·공공기관 및 300인 이상 민간기업, 월 500만원 이상을 받는 고임금 노동자들에 비해 여성·비정규직·서비스직·중소기업 및 저임금 노동자들이 더 휴무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추가근무도 일상이었다. 하루 평균 근무시간(8.05시간) 이상을 근무한다고 응답한 근로자가 811명에 달한 가운데 '일이 바쁘니까'(54.7%)가 최다 사유로 꼽혔고, △수당을 더 벌기 위해(30%) △사업주가 강요하기 때문(15.3%) 등도 주요 이유로 언급됐다.
특히 근로형태에 따른 연장근로 여부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정규직은 22%만이 수당을 더 벌기 위해 일한다고 답했지만, 비정규직은 그 두 배가 넘는 49%가 추가수당을 위해 8시간 넘게 일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비(非)사무직(43.8%) 역시 사무직(18.6%)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인원이 같은 이유로 추가노동을 감수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8시간 이상 근무가 상시화되면서 응답자 '10명 중 7명'은 건강 악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설문대상자의 67.2%는 '피로하다'를 가장 큰 건강상 영향으로 밝혔고, '유해하다'고 답변한 이들도 9.7%나 됐다. 현재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좋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35.3%에 이르렀다.
'귀하는 현재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 64.5%는 '그렇다'고 응답했지만, △별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편이다(29.4%)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6.1%) 등 부정적 반응도 35%를 넘겼다. 각 사업장들의 근로 실상을 관리감독하는 고용노동청과 근로감독관을 신뢰하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도 41.6%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해 신뢰한다는 이들(41.6%)과 같은 수준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절반 이상(63.2%)이 '우리나라 정치가 전태일의 유언과 외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렇지 않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오는 13일 예정된 전태일 열사의 50주기 추도식에서 전 열사가 산업 민주화와 노동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을 두고, 훈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열사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직장갑질119는 "오늘날의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은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파견법, 노무현 정부 시절 제정된 비정규직법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인정했고 법 개정을 약속했다"며 "취임 3년 6개월이 되도록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등의 공약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무궁화 훈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태일이 목 놓아 외쳤던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라며 "문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는 것이 전태일 50주년에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