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형제를 살육한 저 독재에 맞서
그 누구도 여기 남으라 말하지 않았으나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 지켜야 한다면 우리가 남으리라
(누군가의 연인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의 기억 누군가의 눈물)
이름 없는 잡초는 없으리 그 이름을 모를 뿐
이름 없는 뭇별도 없으리
세상이 너를 버려도 우린 기억하리라
너를 위해 너를 위해 싸우리
누군가 싸워야했고 내가 그 앞에 있으니
사람으로 사람답게 싸운다 싸운다
5·18 광주도청에 남은 시민군들. 곧 태어날 아기의 아빠, 고등학생, 대학생, 누이들...
평범한 사람들이 도청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남도립국악단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제작한 오라토리오 집체극 '봄날'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번 공연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며 스러져간 가장 '보통 사람들'의 가장 치열했던 '봄날'을 역순행적 구성으로 재현한 종합극이다. 특히 단원 80여명이 출연해 웅장한 '오라토리오 집체극'으로 풀어낸다. 오라토리오는 독창과 합창, 관현악을 전면에 내세운 극음악으로, 여기에 드라마적 요소와 국악의 악가무타(樂歌舞打:창악·기악·무용·사물부 포함)를 더해 신선한 서사 구조를 가진다.
'봄날'의 극본을 집필한 김수형 작가를 6일 서울 동대문구 '동네책방'에서 만났다. 김 작가는 판소리 뮤지컬 '닭들의 꿈 날다', 판소리 잔혹극 '해님 달님' 등 다수 작품을 집필한 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왜 거기 남았을까 그들은 왜 거기 남았을까
빛바랜 전남도청 건물 시멘트 전남도청 건물
쏘지도 못할 총을 들고 싸우지도 못할 맨주먹으로
모두가 모두가 잠든 새벽 모두가 모두가 잠든 새벽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새벽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새벽
그날 그 봄 참혹한 새벽 그날 그 봄 참혹한 새벽
그들은 왜 거기 남았을까 그들은 왜 거기 남았을까
무엇을 무엇을 지키려했나 무엇을 무엇을 지키려 했나
그들은 왜 거기 남았을까?
이 물음에 김 작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았다"고 전했다. 한 마디로 '사람다움'이다. '사람다움'이 훼손돼 자기중심성과 자기욕망에 사로잡힌, 야망과 권력을 가진 그들이 만들어낸 절대 위기 속에서 사람답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다움'의 순수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극에 나오는 망자의 이름이 '아무개'다. 그들에게는 자기 목숨을 위해 싸워준 사람들이 가장 위로가 되고 힘이 돼 계속 도청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 그들은 계속 떠나지 않다가 마지막에야 떠나간다.
김 작가는 "혼령이 떠나지 않고 죽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억울함과 분함이 아니라 위로와 치유의 개념"이라며 "광주 시민들이 끝까지 싸워줬던, 그 인간다움에 대해 위로받고 안식처가 되는 모습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지 맘대로 지맘대로 내 맘대로 내 맘대로
지 맘대로 내 맘대로 지 맘대로 내 맘대로
맞아 나야 나
내 이름은 전 두 환
와라와라와라와라 환 환 환 전두환
와라와라와라와라 환 환 환 국무위원은 당연히 내 밥이고
국무위원도 몽땅 내 밥이고
판사들도 모조리 내 밥이고
건국 이래 최고권력
건국 이래 최고권력
나 중앙정보부장 전 두 환
와라와라와라와라 환 환 환 전두환
와라와라와라와라 환 환 환 전두환
광주를 진압해 광주를 장악해
광주를 봉쇄하고 대한민국을 접수해
(자진모리) 청와대 옆 궁정동 총소리 세상이 깜짝 , .
거기서 기타를 치던 심양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심양도 깜짝 완전 깜짝,
5·16 쿠데타로 나라의 권력을 움켜 쥐고 대통령만 십팔년
십팔 욕이여?
유신군부독재 십팔년 그 자체가 욕이여
그 욕됨을 참지 못하고 부산 마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소재 자체가 엄숙해 자칫 가라앉을 수 있지만 중간중간 해학과 재미가 넘쳐 우리 장단인 국악과도 잘 어울려 감칠맛이 난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초고 작업은 수정을 거듭해 지금까지 15번의 수정 작업을 거쳤다.
택시 수백대가 금남로 시위 행렬에 참여하는 장면은 웅장함과 열망, 외침의 힘을 사물 타악으로 표현했다. 기존의 뮤지컬로 할 수 없는 독특한 부분이다.
5·18 첫번째 희생자인 어느 청각장애인의 죽음 장면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에 대한 신군부의 권력, 국가 폭력을 보여준다. 김 작가는 "한 인간이, 훼손된 인간성이 얼마나 매몰찬지 보여준다"며 "국가 권력이 장애인을 위해할 수 있다는 것에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폭도'로 매도당했던 시민들은 주먹밥을 서로 나눠먹으며 밤새 경비를 서며 시신들을 지키며 그곳에서 함께 살아나갔다. 김 작가는 "절대 위기 속에서 시민들이 대처한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며 "사람이 얼마나 사람다울 수 있는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아침밥 먹는, 잃어버린 일상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인간다운 모습은 울컥한 장면들"이라고 말했다.
음악을 맡은 전남도립국악단 류형선 예술감독은 "5·18에 대해 빚진 심정으로 살아가는 예술가 중 작품의 크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 작가가 딱 들어왔다"며 "5·18의 가치가 아직도 논란거리의 대상이고 일부 학살자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군림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교과서에 써 있는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5·18을 진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맥락과도 잘 맞아 떨어져 선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문화행동바람의 김재욱 대표연출가가, 안무는 서울아리랑페스티벌 개막작 '춤추는 아리랑'과 창극 '솔의 노래' 등의 안무를 담당했던 김유미 안무가가 맡았다.
'봄날'은 13일 오후 7시 30분과 14일 오후 5시 전남 무안 남도소리울림터 공연장에서 펼쳐진다.
공연은 사회적거리두기에 따라 182석만 운영되며 전화나 방문을 통해 사전예약을 해야한다. 관람료는 일반 1만원, 대학생·전남도민·군경·소방공무원·10인 이상 단체 7천원, 학생·유료회원 5천원, 65세 이상 노인·국가유공자·장애인 등은 무료다.
25일 오후 5시 18분부터 도립국악단 유튜브 채널과 네이버TV를 통해서도 방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