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르는 새 집주인이 바뀌고 시작된 악몽"
박모(34)씨는 2017년 4월 서울 강서구의 한 신축 빌라에 전세로 들어갔다. 보증금은 1억6500만 원. 당시 계약을 맺었던 집주인은 권모씨였다. 2년 전세계약이 끝나기 한 달 전, 박씨는 권씨에게 "연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권씨의 답장이 이상했다. 권씨는 "집주인이 바뀌신 걸 몰랐느냐"고 했다.
박씨는 집을 소개한 ㅎ부동산의 공인중개사 조모씨에게 연락을 했다. 조씨는 "집주인이 바뀌는지 아닌지는 고지할 의무가 없다"고만 했다. 발급받은 부동산 등기부 등본에는 정말로 집주인이 권씨에서 강모씨로 바뀌어있었다.
박씨는 일단 강씨에게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닿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조씨는 강씨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건넸다. 대리인은 "강씨가 임대차보증금을 반환해줄 수 없게 됐다. 대신에 집을 매매할 수 있으니, 원하는 사람은 연락을 주고 아닌 사람은 알아서 보증금 반환소송을 진행하라"고 말했다.
강씨는 283채의 집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였는데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가 주 활동지역이었다. 그런 그는 흔히 아는 '큰 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씨의 집은 반지하방이었고,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다. 그에게 보증금 피해를 본 사람만 최소 수십 명. 이미 단체카톡방까지 개설된 상태였다.
박씨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권씨가 전세계약을 맺을 당시 이미 집은 강씨에게 팔리기로 돼있었다. 박씨는 "권씨가 조씨 등과 작성한 매매계약서를 보면 '전세금'을 받아 '매매금'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그럼에도 당시 저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게다가 박씨가 지불한 전세보증금은 해당 집의 매매가보다도 높은 가격이었다.
박씨는 "저한테는 집의 매매시세가 1억7천만 원이라고 했고, 등기부 등본에도 1억7천만 원이라고 나와있었다"며 "그런데 실제로 매매계약은 1억5천만 원에 체결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전세난이어도 매매가가 전세보증금보다는 높아야 나중에 문제가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임대사업자 없는 빌라를 찾아 확정일자도 떼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당했다"고 허탈해했다.
◇ 200여채 집주인 강모씨, 알고보니 '무자본 전세투기범'
한때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강씨의 수법은 '갭투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강씨의 수법은 외형만 '갭투자'였을 뿐, 실상 '무자본 전세투기'에 가까웠다.
갭투자는 가령 매매가가 2억5천만 원인 빌라를 구입하기 위해 전세보증금 2억 원을 지불하는 세입자를 끼는 방식이다. 적어도 5천만 원이라는 자기 돈이 들어간다.
강씨의 수법은 다르다. 매매가가 2억 원인 빌라를 사기 위해 전세보증금 2억 원 또는 그 이상을 지불할 세입자를 찾는 식이다. 세입자에게는 매매가를 제대로 고지하지 않거나 박씨의 사례처럼 시세를 부풀렸다. 실거래가 흐름이 추적되는 아파트가 아니라 신축 빌라를 주요 타깃으로 삼은 이유다.
매매가와 전세보증금이 같으니 강씨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을 가졌다. 강씨가 집을 무려 283채까지 늘릴 수 있게 된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강씨와 집을 소개해준 공인중개사 조씨는 분양대행사로부터 'R'이라고 불린 리베이트를 지급받았다.
조씨가 강씨를 상당부분 도왔다는 진술도 나왔다. 조씨가 돈이 없는 강씨의 재산세를 대납해줬다거나, 법무사 비용을 면제해줬다는 게 대표적이다. 심지어 부동산 거래에 따른 중개 수수료도 둘 사이에서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283채분의 취·등록세와 재산세조차 낼 돈이 없었던 강씨의 전세보증금 반환 문제는 예견된 결과였다. 2019년 1월부터 피해자들의 연락을 피하던 강씨는 2019년 4월 대리인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 경찰, 강씨와 공인중개사 조씨 송치…사기 혐의 적용 '관건'
박씨를 비롯한 세입자 14명은 결국 지난해 8월 강씨와 조씨를 사기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임대차 보증금 명목으로 25억 원의 사기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였다.
남부지검으로부터 해당 사건을 내려받은 서울 강서경찰서는 1년간 수사한 끝에 강씨에게 사기 혐의, 조씨에게 사기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지난 8월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
사실 보통의 갭투자라면 사기 혐의를 적용하기 쉽지 않다. 처음부터 돈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사정이 생겨 의도치 않게 돈을 돌려줄 수 없게 됐는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애초부터 강씨와 조씨에게 돈을 돌려줄 의도와 능력이 없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강씨와 조씨가 공모해 사기를 벌였고, 조씨가 강씨를 이른바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조씨가 보조중개인들의 몫을 포함해 1억7천여만 원의 리베이트를 수수한 사실도 확인했다. 조씨는 자신 몫의 리베이트에서 일부를 다시 강씨에게 지급했다.
사건을 다시 넘겨받은 남부지검은 현재 해당 사건을 추가로 조사하고 있다. 검찰 역시 강씨와 조씨의 '기망' 의도를 규명하는 데 방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거산의 신중권 변호사는 "이 사건은 돈이 없는 강씨가 갭투자를 해서 부동산을 늘린 사건이 아니다"며 "조씨가 리베이트를 목적으로, 강씨의 명의로 부동산을 취득했고 애초부터 보증금을 돌려줄 만한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는 게 핵심"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