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주인공 채송아(박은빈 분)는 자기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이올린을 가르쳐 준 윤동윤(이유진 분)만이 유일한 응원자였고, 시험을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도 스스로 마련해야 해서 몸과 마음 모두 바빴으며, 무엇보다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시는 시련 속에서도 끝끝내 두드렸고 '서령대 음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채송아가 고생했다고 해서 바로 '낙'을 선물하진 않는다. 비록 고난을 겪긴 했으나 실력이 일취월장해 끝내 웃고 만다는 이야기는 이곳에 없다. 낮은 실기 성적은 여전히 발목을 잡고, 고대해 온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서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로 불발된다. 졸업 후에 뭘 할지 계획은 불투명하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판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과 음악을 너무나 좋아해 놓지 않으려는 채송아의 끈질기고 애달픈 마음인지도 모른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고 잘하냐고 가볍게 던진 물음에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답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꺼내고,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고 하는, 헌신적인 짝사랑.
CBS노컷뉴스는 호평 속에 종영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쓴 류보리 작가를 지난달 22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지난해 2부작 '17세의 조건'으로 시청자를 처음 만난 류보리 작가는 첫 번째 장편 미니시리즈를 쓰면서 평소 좋아하는 것, 마음이 쓰이는 상황이나 감정을 떠올리다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시작했다.
"욕망을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사람들"보다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갔다는 류 작가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진실되게 사랑한 시간은 결과를 떠나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펼쳐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출퇴근길마다 지나다니던 건물에 드라마 작법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 곳을 알고 궁금증에 등록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드라마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큰 재미와 저 스스로 힐링이 되는 것을 느꼈고, 그즈음 제가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매우 추상적이고 거창한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드라마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SBS 문화재단에서 인턴 작가를 할 때 미니시리즈 과제로 낸 작품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고, 조영민 PD가 당시 시놉시스와 1, 2부 대본을 보고 같이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어디서 왔나요.
평소에 저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어쩌면 그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인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인물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미니시리즈 습작이었기 때문에 평소 제가 좋아하는 것들, 저의 마음이 쓰이는 상황이나 감정들,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들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 주인공 채송아를 화자로 세웠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에 방점을 찍고 채송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요.
다른 인물들은 드라마틱한 전사나 트라우마가 있지만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인물의 '무엇인가를 진실되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도 그런 서사만큼이나 소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꿈과 현실, 사랑과 노력, 한계와 수용, 이별 등의 키워드를 쭉 정리해보니 '좋아하는 마음'이 전체 극을 이끌어가는 메인 키워드로 잡혔습니다.
결국 이 드라마를 통해, 진실되게 사랑한 시간은 결과를 떠나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내면이 단단하고 강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스스로 가장 먼저 일어서는 인물이자, 화려해 보이고 강해 보였지만 사실은 약했던 다른 이들을 일으켜줄 사람을 그리고 싶었기에 송아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로맨스지만 동시에 성장물이고, 딱 하나의 장르 카테고리를 골라야 한다면 '사랑'에 대한 성장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연애적 감정의 사랑에 한정 지은 것이 아니라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중의적 의미입니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전개와 결말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꿈과 (연애적) 사랑이 투트랙으로 흘러가며 서로의 업다운을 상호보완해주는 전개가 아니라 중의적으로 함께 얽혀 평행노선에 가깝게 전개되기 때문에 낯설고 어렵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꿈에 대한 짝사랑'이라는 키워드는 내내 가져가되 초반에는 멜로에 조금 더 큰 비중을, 후반에는 성장에 좀 더 큰 비중을 두려고 했습니다.
5. 차분하고 정적으로 보이지만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잔잔마라맛 드라마'라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특히 어색함 속에서도 훅하고 다가오는 설렘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전적으로 감독님과 배우분들 덕분입니다. 대본 텍스트상에서 최대한 각 장면 공기의 밀도를 표현해보고자 하다 보니 대본에 '어색하다' '마음이 복잡하다'라는 지문과 함께 말줄임표를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저런 지문이나 말줄임표가 없어도 감독님과 배우분들이 '마가 뜨는' 시간을 설레게 잘 살려주셨겠지만, 대본을 쓰는 저는 그런 지문들과 말줄임표가 만들어내는 호흡을 느끼면서 대사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대본을 완성하면 그 해석은 전적으로 감독님과 배우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어색함과 설렘의 공기를 훨씬 생생하게, 훌륭히 살려주신 감독님과 배우분들께 다시 한번 찬사와 감사함을 보내고 싶습니다.
6. 중후반부, 특히 11~14회에는 등장인물들이 고난을 겪거나 갈등하는 것이 반복돼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회의 해피엔딩이 반가웠고, 특히 두 사람의 사진과 내레이션 덕분에 더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느꼈습니다. 해피엔딩이라는 큰 그림을 처음부터 짜 두셨던 건가요.
결말이 해피엔딩이냐는 질문을 몇 번 받았었는데, 그럴 때마다 '해피엔딩의 정의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각자 절실히 원하는 외적 목표를 모두 성취하는 결말은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결말이었지만 인물들이 내적으로 단단해지면서 행복을 향해 걸어가며 성장하기에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이 된 것 같습니다.
각 주인공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회에서는 앞 회차들의 많은 장면들이 조금씩 변주되어 반복되는 장면을 많이 넣었는데, 이 드라마가 A라는 인물이 일련의 사건을 겪고 B가 되는 판타지는 아니지만 각자 성장했고 행복을 찾아간 A'가 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