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판]3년 전 정부 '택배대책' 지켰으면 14명 과로사 막았다

2017년 TF 꾸린 국토·노동부…택배기사 과로사 대책 발표
표준계약서 마련·산재보험 확대 등 주요 핵심대책 다 담겨
입법미비 등 이유로 모두 무산…유야무야 사라진 TF
전문가 "사람 계속 죽어나는데…해결책 알면서 뭐했나"

※우리는 일합니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오늘도 일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쉼없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모든 노동자에게, 일터를 찾은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판깔아봅니다. [편집자 주]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 택배분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윤창원 기자)
올해 9명의 택배기사가 과로사한 가운데, 이러한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대책을 정부가 3년 전에 이미 발표한 것으로 확인됐다. 관계부처들이 전담 '태스크포스'(TF)까지 꾸려 이를 추진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밝혔지만, 법 개정·제정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모두 무산됐다.

정부가 대책을 다 내놓고도 택배회사의 반대와 입법 미비 등을 핑계로 손을 놓고 있는 사이 3년 동안 14명의 택배기사가 현장에서 스러졌다. 전문가들은 "법이 없다고 손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정조치를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3년 전 국토부 '택배서비스 발전방안' 발표…과로사 막을 대책 '총망라'

지난 19일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열린 한진택배 규탄 기자회견에서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숨진 택배노동자를 위한 묵상을 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2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2017년 11월 국토교통부는 택배기사 근로계약서·산재보험 확대 등 처우 개선 대책이 담긴 '택배서비스 발전방안'을 발표했다. 그 해에만 택배기사 4명이 과로사로 숨지자 정부가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국토부는 "택배기사에게 일반 근로자와 유사한 초과근무 수당과 휴가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근로 조건을 기입한 표준계약서를 마련할 것"이라며 "택배기사의 산재보험 가입을 확대하기 위해 산재보험 적용제외 사유를 질병 등 불가피한 사유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이어 "소비자는 온라인 쇼핑업체에게 2500원의 택배요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 택배회사에 지불되는 택배요금은 평균 1730원"이라며 "택배회사가 실제로 받는 요금을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택배요금 신고제'도 도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택배 종사자의 노동 강도는 현재보다 수월해지고 막힘없는 택배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제공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개선대책의 시행 및 모니터링을 위해 관계기관 합동 전담팀(TF)을 구성·운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국토교통부 제공)
이는 모두 택배노동자들이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요구해 왔던 내용들이다. 특히 택배기사는 산업재해에 쉽게 노출되지만, 택배사 강요로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택배요금 신고제 또한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대책이다. 이는 택배사가 대형 업주에게 '백마진'(리베이트)을 주는 것을 금지하고, 이 돈을 택배노동자 수수료 인상이나 인프라 확충 등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올해 9명의 택배기사가 스러진 현재, 정부의 대책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산재보험 가입은 여전히 유명무실이다. 최근 사망한 택배기사들의 '산재적용 제외 신청서'는 대필까지 된 것으로 밝혀져 파장이 일었다.

표준계약서 마련 역시 노사 협의가 결렬되면서 중단됐고, 산재보험 가입 확대는 법률 개정을 시도했지만 택배사와 보험사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

택배요금 신고제 또한 시행령 입법 예고까지 진행됐지만,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실제 요금이 시장 요금이며 운임 신고시 택배업체간의 담합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을 내면서 무산됐다. 당시 "2022년까지 핵심 추진과제들을 완료할 예정"이라며 꾸린 TF는 여론의 관심이 시들해지자 유야무야 사라졌다.

국토부 관계자는 "당시는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며 "어떻게 보면 그 당시의 한계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당시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일명 택배법) 제정을 계기로 다시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관계자 역시 "TF가 사실 가동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해당하는 내용들은 각 소관과에서 추진되고 있다"면서 "산재보험 확대 등은 현재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돼서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해결책 모두 아는데도 손 놓은 정부…전문가 "사람은 계속 죽어나는데, 뭐했나"

지난 6월 28일 오후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전국택배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택배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법 제정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전문가들은 '입법 미비'를 이유로 정부가 사실상 문제를 방치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점과 해결책이 명백하게 제시돼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지금의 참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일과건강의 한인임 사무처장은 "사람은 계속 죽는데, 법은 멀리 있다. 정부가 당연히 긴급행정조치를 취했어야 한다"며 "일주일에 90시간씩 일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한 사업주에게 감사를 요구하는 등 행정명령 같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들이 사망하고 있는데 보호할 법이 없으니 죽으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법이 설사 없다고 할지라도 노동부에서 근로감독에 들어갔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뒷북 행정이 또다시 공염불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19일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등의 주요 서브(Sub) 터미널 40곳과 대리점 400곳을 대상으로 과로 등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조치 긴급점검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8월에도 이 장관이 택배사 대표들과 '심야배송 시 적정 휴식시간 보장', '택배노동자 건강 보호 및 작업환경 개선' 등이 담긴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에도 과로로 숨지는 노동자들은 계속 발생했다. 특히 정부가 추석 기간 분류작업 인원을 추가 투입하겠다고 밝혔지만, 고(故) 김원종씨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정부의 추진 노력과 함께 입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성희 교수는 "택배기사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아야 정부가 근로감독 등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서 "결국 입법을 해야 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택배기사 등 특수고용노동자의 근로자성 인정에는 많은 '재벌'이 관련돼 있어 거기에 꽉 막혀 있다"며 정부가 의지를 갖고 물꼬를 터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과로로 숨진 택배기사는 2017년 4명, 2018년 3명, 2019년 2명 등으로 나타났다. 올해는 현재까지 9명이 과로사했다. 이외에도 올해 분류업무나 터미널 간 배송 업무 등 배송 외 작업을 맡는 택배업 종사자 4명도 과로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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