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동명 소설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드라마는 클래식을 전공하는 청춘들의 흔들리는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평생 동료의 아내를 사랑했던 브람스의 짝사랑이라는 모티프는 초반부 비중 있게 그려진다.
마지막 회 방송을 앞둔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채송아 역 박은빈의 종영 인터뷰가 열렸다. "브람스를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에 "좋아하게 되었다"라며 웃었다. '꾸준히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했던 브람스를 선망하게 되었다고.
문득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박은빈은 바이올린을 잘하냐고 했을 때 "좋아해"라고 답한 것(1화), 준영에게 울먹이듯 고백한 장면(2화)을 가장 좋았던 장면과 두 번째 좋았던 장면으로 꼽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브람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 준영이 송아 마음에 돌멩이를 던진 순간
극중 준영과 송아의 첫 만남은 꽤 극적이다. 안식년임에도 특별히 연주하러 온 유명 피아니스트. 실기 성적 꼴찌라는 것을 가지고 지휘자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무대 퇴장을 요구받는 늦깎이 음대생. 열심히 연습했기에, 예술의 전당 무대에 처음으로 오르는 기회이기에, 용기를 내어 자리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으나 결국 쫓겨난 송아. 운 좋게 창문 틈으로 준영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충격적인 그 동윤이(이유진 분)와 민성이(배다빈 분)의 사건을 알고 나서, 누군가 그렇게 음악으로 위로해 준 적이 처음이었다고 송아가 회상하잖아요. 어떤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통해서 그동안 받아본 적 있나 싶었던 위로를 대신 전해주었다는 것, 송아한테는 굉장히 마음에 훅 스며든 계기가 됐을 것 같아요. 그리고 준영이라는 사람이 가진 상냥함에 대해서 인지했는데, 또 계속해서 얽히면서… 막 청계천에서 '송아씨가 보고 싶었던 거네요' 이러면서 막 그러잖아요? (일동 폭소) 그러니까 막 당연히… 이제 뭐 '동윤이가 누구죠?' 약간 이런 거죠. (일동 폭소) 당연히 준영이한테 마음이 방향성이 갈 수밖에 없었을 거 같아요.
그 뒤에 또 예중! 예중에서 같이 가잖아요. 경후재단 앞에서 웃으면서 다가오는 준영을 보면서 설레고… (웃음) 결정적인 시작은 뭐, '월광'(연주)이 전환점이 됐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실 준영의 연주를 봤을 때 있잖아요. 라흐마니노프 치고 있는 모습을 그 예술의 전당 틈 창문으로 보잖아요. 그의 재능을요. 그때부터 이미 뭔가 사실상 그 박준영이라는 피아니스트가 가진 빛나는 재능이, 아마 송아의 가슴 속에 어떤 작은 돌멩이라도 던지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옆 커플' 정경(박지현 분)과 현호(김성철 분)의 사랑은 어떻게 보았을까. 박은빈은 본인도 방송으로 확인했기에 시청자와 비슷한 시각이었다고 답했다. 드라마 대본을 받고 "아날로그적인, 클래식한 감성의 잔잔하고 서정적인 멜로가 되겠다고 살짝 착각"했다는 그는 "이 내용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려면 인물간의 감정선에서 치열한 고민이 엿보이고, 침묵 속에서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해야만 사람들이 그 포인트에 집중해서 이 정적을 메울 수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이 드라마를 '잔잔마라맛'이라고 한 시청자들의 평을 보고서도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더 잘 봐주고 계시는구나, 해서 되게 감사했다"라고 덧붙였다.
드라마 중후반부에는 송아의 방황과 고뇌, 송아와 준영을 향한 좋지 않은 소문 등 어두운 분위기의 이야기가 전개됐다. "송아를 응원하는, 곧 송아에게 자신을 투영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응원하게 되길 바랐다, 저는. '송아야 행복해', '송아야 잘되라' 이런 말들이 곧 자신에게 보내는 헌사이길 바랐다"라고 운을 뗀 박은빈은 "근데 점점 제가 우려했던 대로 '송아 답답하다, 미련하다' 하시더라. 그만큼 감정 이입을 해서 진심으로 봐주셨던 거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답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결국 사랑이기 때문이죠. 내가 스스로 미련하다는 걸 알고 못 놓는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의 집착이라는 걸 알지만 그동안 해 온 게 있고 온몸으로 헌신했던 세월이 있는 거잖아요. 그걸 한순간에 놓을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봤어요. 사랑이기 때문에 이렇게 답답할 수밖에 없고요. 누군가는 미련이라고 꾸짖을 수 있는 포인트가 생기는 것 자체가, 그만큼 진심이었던 걸 증명하는 거라서 '송아는 이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합리화했어요. (웃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청춘 멜로'로 소개한 박은빈은 "이런 청춘 드라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결과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는 드라마이지 않나. 청춘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인 거 같아서 결과를 알고 보시면 그 과정도 다시금 응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바라봤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실제로 클래식을 전공하고 뉴욕필하모닉 등에서 일한 류보리 작가의 첫 장편 드라마다. '포코 아 포코 : 서서히, 조금씩', '콘 페르메차 : 확실하게, 분명하게', '소토 보체 : 속삭이는 마음으로', '아르페지오 : 펼침화음' 등 악보에 쓰이는 음악 기호가 각 회 부제로 붙었다. 박은빈은 "소제목이 붙는다는 게 굉장히 세련되다고 느꼈다. 오늘 부제가 '크레센도'다. 점점 크게라는 뜻인데 지금이 가장 작은 상태니까 앞으로 점점 커질 일만 남아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가장 공감 갔던 대사로는 "저는 언제나 잘 지내고 있다고 그냥 그렇게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라는 준영의 대사를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게 싫으니,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힘들어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었다.
박은빈은 "미디어상에서는 제가 웃은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니까, 제 웃는 모습을 보고 힘낸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제가 울적하거나 힘든 모습은 드라마상으로 보여드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사는 준영을 되게 잘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제게도 와닿았던 대사"라고 설명했다.
◇ 박은빈이 생각하는 '청춘'
아역 배우로 시작해 벌써 데뷔 20년을 넘긴 박은빈은 이렇다 할 공백 없이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하지만 '쉬어야 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일할 때 최선을 다하지만, 끝나고 나서 특별한 여가를 보내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을 때는 무조건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그의 생활 패턴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곧 쉼이고, 충분함을 느끼면 그게 일할 동력이 된다. 박은빈은 "일을 할 때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보니까 노는 데 에너지를 평소에 많이 소모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거 같다"라고 밝혔다.
'청춘시대' 시즌 1~2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청춘의 다양한 결을 보여준 박은빈. 청춘물을 여러 번 한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청춘시대'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한동안은 사극을 많이 했다. 그때는 성장의 밑거름은 되었을지언정 되게 애늙은이 같단 소리를 들었다. 나이 많은 역할을 해야 해서 힘에 부쳤고, 그 간극을 연기적인 면으로 채워야 한다는 걸 굉장히 크고 무거운 과제로 받아들였다"라고 말했다.
'청춘시대'를 마치고 나서는 청춘을 "되게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기"라고 표현했다. 당시 박은빈 역시 고민을 품고 있었기에. 지금은 어떨까.
"뭔가를 꿈꿀 수 있고 자기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있는 한 계속 청춘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다 알고 더 이상 알아갈 것이 없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거야' 하는 순간 청춘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동력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직 자기에 대해 탐구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