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수 끝에 음대생이 되었어도, 한참 뒤처지는 실기 성적은 근심거리다. 난생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서는 날,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지휘자는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크다며 퇴장하라고 한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쥐어짜 말한다. "연습 많이 해 왔는데요. 같이 연주하면 안 될까요?"라고. 돌아오는 건 "꼴찌를 하지 말든가"라는 모욕적인 발언뿐.
졸업하면 계획이 있는지 가족도 묻고, 동기들도 뒤에서 걱정을 가장하며 수군거린다. 졸업 후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채송아는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다. 하루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안 하면 동료가 알고, 사흘 안 하면 관객이 안다는 말을 믿으며 틈날 때마다 연습하고, "바이올린 잘해요?"라는 가벼운 물음에 어렵게 속마음을 꺼내듯 "좋아해, 아주 많이"라고 고백하는 순애보.
자기 이름을 대면 '대뜸 뭐가 죄송하냐'는 말을 곧잘 듣는 채송아. 클래식 학도인 스물아홉 청춘의 꿈과 사랑, 고민을 담은 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주인공이자, 극중 설정처럼 올해 스물아홉이 된 배우 박은빈에게 주어진, 그리고 박은빈이 선택한 배역이다.
◇ 자립하려고 하는, 똑똑하고 강한 사람 채송아
박은빈은 채송아를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바라봤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 박준영(김민재 분)에게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반주 요청을 할 때를 예로 들며.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이정경(박지현 분)은 '나 잘하고 싶어', '이번 연주회는 나한테 중요하니까 네가 도와줘' 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채송아는 "자신의 힘이 미약한 걸 알지만 스스로 부딪혀보려는 사람, 자립하려는 힘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박은빈은 "자기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충분히 부족함을 알고 어떤 부분을 채워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 송아가 되게 강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인물은 겉으로 강해 보여도 여린 면이 있지만 송아는 여려 보여도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 그게 마지막까지 작가님이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걸 깨닫기까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결국 본인 의지로 누구보다 단단한 발걸음을 걷게 된다는 것, 스포일러가 될까 봐 숨겨져 있던 시놉시스 인물 소개 중 하나였다"라고 밝혔다.
채송아와 얼마나 닮았는지 질문하자 그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점을 꼽았다. 송아는 잘 들어줬다. 오랜 친구 민성(배다빈 분)의 얘기도, 처음에는 매니저 역할처럼 만난 준영의 속내도. 안 지 얼마 안 된 현호(김성철 분)나, 준영을 두고 긴장 관계에 있던 정경조차도 송아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난히 '외유내강' 캐릭터가 많이 들어오는 것 같다는 말에는 "외강내유한 역할을 언젠가 꼭 해 보고 싶다. 근래에 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알맹이랄까, 이런 걸 여과해 보면 되게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더라. 결코 범법을 저지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별해낼 줄 아는 사람들이랄까. 어쩌다 보니 그런 역할을 맡게 됐는데, 그 점이 제 안에 있는 모습이기도 해서 좀 더 설득하기 쉽지 않았을까"라고 답했다.
◇ 박은빈이 진입장벽으로 여겼던 장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갸우뚱하거나 우려했을 만큼, 채송아는 평탄하지 않은 길을 스스로 걷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박은빈은 '채송아라면, 이럴 수 있다'라는 것을 설득해야 했다. 첫 회에 나온 무대 퇴장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했고, '진입장벽'이라고 표현할 만큼 어려운 장면이기도 했다.
"그렇게 백여 명의 사람이 쳐다보는데, 나가라고 해도 무대에 서고 싶어서 버틸 수 있는 게 큰 용기이자 '송아라는 사람은 이럴 수 있습니다' 하는 걸 보여주는 씬이었어요. 송아를 잘 모를 때 '왜 나가라는데 안 나가?' 하며 타박할 수 있는 지점이란 생각이 들어서, (시청자에게) 송아의 감정을 이해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바이올린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줘야만 하는데, 대사가 별로 없다 보니 복잡한 감정을 시청자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했죠. 특히 극의 초반이고, 앞으로의 내용을 이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되게 고민을 많이 했던 시퀀스였어요."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뒤처져 주눅 든 채송아의 현실은 녹록지 않고, 그래서 감정 소모가 큰 에피소드도 자주 나왔다. 힘들지 않았는지 묻자, 박은빈은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어떤 게 앞으로 연기할 때 저한테 좋은 방향이겠구나 설정한 게 있다. 캐릭터의 삶과 저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개인의 안녕에도 도움이 되고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원동력 같다"면서 "연기할 땐 힘들 수도 있지만 거기에 매몰돼서 못 빠져나오고 그런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래야 더 힘있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끝이 없는 경쟁, 지도교수 간의 알력 다툼 등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업계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피하지 않고 두루 다룬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새롭게 알게 되거나 느낀 점이 있을까. 박은빈은 바이올린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베토벤의 '콘체르토'를 연주했을 때 지도교수가 그냥 듣더니 화도 안 내고 "OO야, 베토벤이 쉽니?"라고 물었다는 얘기다. 박은빈은 "만약에 연기했는데 '은빈아, 연기가 쉽니?' 하면 저도 심장이 쿵 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라며 "지도교수님의 고상한 '쉽니?'라는 말이 되게 충격적이더라"라고 웃었다.
◇ 재능에 대해 질문하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재능에 대해 자주 질문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재능이 특출하지도 않지만 아주 넓고 깊은 '좋아하는 마음'을 지닌 송아와, 쇼팽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을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준영, 중간 정도 성적이라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는 해나(이지원 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신동으로 칭송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기량이 정체된 정경… 가진 재능이 천차만별인 극중 인물들은 각자 놓인 자리에서 저마다의 불안함과 걱정을 안고 산다.
재능과 관련해 언쟁을 벌이는 장면도 나온다. 어렸을 적부터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상금이 걸린 콩쿠르에 쉴 새 없이 참가해야 했던 준영은 "재능은 없는 게 축복"이라고 말한다. 송아는 "좋아하고 노력해도 재능이 없어서, 재능이 부족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라며 "재능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나 해요?"라고 속상한 마음을 표출한다.
박은빈은 음악을 하는 오빠에게 들은 말이라며 '애매한 재능은 비극'을 언급했고, "저는 그쪽에 마음이 가더라. 애매하다는 건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포기할 만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확신을 얻기에 여러모로 어려운 선택지가 주어진 거니까. 그런 지점에 있어서는 사람을 참 시험에 들게 하는 부분이니까…"라고 전했다.
어떤 일을 계속해나갈 힘을 재능 여부로 판단한다면, 박은빈 또한 '나는 재능이 있나?' 하고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연예계에는 재능 넘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은 기질적으로도 잘 나서거나, 누군가의 눈에 확 띄게 표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과연 이게 맞나? 내게 주어진 재능은 무엇일까?' 오래 생각했다.
일단 확실하게 깨달은 건 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잘 버티면서 연기했던 걸 보면 인내심이라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눈앞에 보이는 험난한 길을 스스로 택한 송아와 겹치는 부분이다. 박은빈은 "(송아는) 타고난 노력가인 것 같다. 후천적으로 양성된 노력일 수도 있지만, (바이올린을) 사랑했던 것 같다. 서령대 경영을 갈 정도면 송아는 뭘 하든 잘하지 않았을까. 모든 거에 진심인 사람이니까"라고 부연했다.
일이나 직업이 아니어도, 무척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게 있냐고 묻자 박은빈은 "저 노래 잘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노래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는 게 노래인 것 같다. 배우는 감정을 갖고 (노래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실력과는) 별개인 것 같다"라며 '복면가왕'에 나가면 바로 탈락일 것 같다고 답해 웃음을 유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