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8일 공무원 피격 사건 발생 엿새만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방점을 찍은 것은 '분단의 역사를 끝내자'는 것이었다. 종전선언을 해야한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음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민이 북한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해 아직 시신을 수색하는 과정에 있지만, 청와대는 이번 일을 계기삼아 오히려 남북 대화의 고리로 삼고 '종전선언'의 불씨를 당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종전선언에 조급해질수록 북한은 물론이고 미국도 호응하기 쉽지 않고, 국내 여론만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상당하다. 오히려 우리 정부 스스로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문 대통령, 엿새만에 대국민 사과 뒤 곧바로 '반전의 기대감' 드러내
문 대통령은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 엿새만인 28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대단히 송구하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다만,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의 사과를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며 북한을 향해 재발 방지를 위한 협력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대화가 단절되어 있으면 문제를 풀 길이 없고,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재발 방지를 위한 실효적인 대책도 세우기가 어렵다. 이번 비극적 사건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대화와 협력의 기회를 만들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반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문을 발표한 직후 "남북관계의 개선을 얘기할 때는 아니다"고 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톤이다. 우리 국민의 비극을 남북 대화의 '지룃대'로 삼으려한다는 비판이 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반전의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에 힘을 실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 앞으로의 처리 결말 역시 분단의 역사 속에 기록될 것"이라며 "비극이 반복되는 대립의 역사는 이제 끝내야 한다"고 말해 종전선언의 재추진을 암시했다. 아울러 '공동조사' 제안에 대한 북한의 답이 아직 없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적어도 군사통신선만큼은 우선적으로 복구해 재가동하자"고 추가 제안을 하기도 했다.
◇ 靑 내부, 미국 대선 전 무언가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 있나
이처럼 문 대통령은 왜 아직 우리 국민의 시신을 수색중인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반전되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했을까.
우선, 미국 대선을 앞두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할 수 있는 발판을 다져놓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 비핵화는 물론 남북간 시계도 멈춰있지만 우리 정부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종전선언'을 최우선적으로 이뤄내고 다음 평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제안을 꾸준히 해왔다. 23일 유엔 기조연설에서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 얘기를 재차 꺼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청와대는 미국 대선과 문 대통령의 남은 임기 타임테이블을 보며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떻게되든 한반도 평화 기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선 전에 무언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든 조 바이든이 정권교체를 이루든 간에 미국 대선이 끝나면 적어도 수개월은 북한 문제가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지금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공동조사 제안에 대한 북한의 답신이 오기도 전에 대화와 협력, 남북관계 진전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같은 조급한 분위기의 발로인 것으로 보인다.
◇ 정작 미국과 북한 움직이기 쉽지 않아…전문가들 "차분히 속도조절 할 때" 충고
문제는 정부의 조급함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 주체인 북한과 미국이 움직일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이번 피격 사건은 북한 정권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국면에서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미국 여론상 때아닌 종전선언이 추진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이번 사건은 미국에서 '오토 웜비어'사건을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시점에 종전선언을 추진한다고 하면 미국 여론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호응하기는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북한 입장에서도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멈춰있는 상황에서 종전선언 제안을 받아드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에 우리 정부가 대북정책에 있어 속도 조절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여권 관계자는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배경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우리 국민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하고 이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박원곤 교수는 "북한과 미국이 각각 처한 상황이 있는데 우리만 속도를 높인다고 평화 프로세스의 성과가 나기는 어렵다"며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남북 관계를 좀더 차분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