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거처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물이 찬 집을 본 주민들의 한숨이 더 깊어지고 있다.
10일 오전 전북 남원시 하도마을.
임시 거처가 마련된 금암문화누리센터에서 눈을 뜨자마자 집을 찾은 백명엽(77) 할머니는 가장 먼저 작은 가방부터 찾았다.
흙탕물에 젖은 관절약과 위장약이 있었다. 백 할머니는 처방받은 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데 사흘째 걸러 몸이 편치 않다고 했다.
백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현관에 뒤집힌 채 놓인 신발장이 막아섰다.
겨우 신발장을 밟고 안으로 들어간 내부는 모든 가구와 옷가지가 흙탕물 범벅이었다. 저마다 입구로 쏠린 가구 탓에 문들은 열리질 않았다.
백 할머니는 그렇게 마을 이장이 대피하라는 말에 부리나케 집을 빠져나왔다. 휴대전화도 챙길 겨를이 없다 보니 객지에 사는 가족의 걱정도 커졌다.
물은 목까지 차올랐다. 벽지에 새겨진 자국으로 물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들 조동권(57)씨는 죽은 강아지를 발견했다.
"세상에 방에 둔 강아지도 죽어버렸는갑소. 5년은 키웠는데 눈도 못 감고…"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기면서 내부는 한낮에도 어두웠다.
물이 나오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물 퍼 나르기를 포기한 채, 간신히 물에 젖은 집기를 외부로 꺼내는 수준이었다.
집을 둘러보는 노부부가 집기를 밖으로 꺼내기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조 할아버지는 키우던 개 2마리와 닭 25마리를 묻었다.
혈압과 당뇨약을 찾지 못한 임 할머니는 여수와 서울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더 걱정했다.
올해 여든여덟인 임봉순 할머니는 집이 통째로 잠겼다.
흠뻑 젖은 영정용 사진만 건졌다. 임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가 아침부터 폐기물이 된 집기를 트럭에 실어 날랐다.
시내 아파트에 살아 다행히 비 피해는 없었다는 아들 오정훈(48)씨는 "모든 집기를 버리고 집도 수리해야 할 것 같다"며 "혼자 사시는 어머님이 많이 놀라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농기계도 침수되며 올해는 고사하고 내년 농사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지난 8일 섬진강 제방이 무너지면서 금지면 마을은 하나하나 도미노처럼 연달아 물 속에 잠겨들어갔다.
조씨는 "섬진강 댐 방류 확대로 뚝(둑)이 무너져서 피해가 큰 것 같다"며 "지반이 약하고 굴다리가 약하니까 뚝이 터졌고 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펌프장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둑이 없을 때도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졌는데, 둑까지 무너진 건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은 10일 오전부터 유실된 제방에 돌과 흙쌓기를 반복하며 사고 원인을 찾고 있다.
다행히 주민들은 둑이 터지기 전에 인근 금지초등학교로 대피하며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학교 강당에 물이 스며들어오면서 대피했던 주민들은 금암문화누리센터 등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주민들은 대한적십자사가 마련한 임시 텐트에서 지내고 있었다.
경찰, 군인이 팔을 걷고 주택 복구에 나섰고 이웃 주민은 이재민에게 옷가지와 끼니를 챙겨주고 있다.
공로 연수 중에 자원봉사에 나선 황의흥(60)씨는 "전주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옷가지를 보내줘 이재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남원이 794명으로 가장 많았고, 진안 421명, 장수 217명, 임실 149명, 순창 107명, 전주 14명 등이다.
시설피해는 도로 유실 등을 포함해 모두 1080건(공공시설 311건·사유시설 7698건)이 보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