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신빙성 있다" 판단한 인권위…'박원순 성추행' 규명 가능할까

인권위, 상임위 열고 '박원순 성추행' 직권조사 결정
정상환 전 상임위원 "증거 신빙성 있다 판단한 것"
'강제수사권 없음' 한계…인권위 "방안 있어" 반박
전문가 "재발방지 위해 사회 전체 시스템 손봐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박종민 기자)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직권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사안이 중대하면서도 피해자 측이 제출한 근거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 예정이었던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의 진상이 어느 정도는 규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강제수사권이 없다는 점은 인권위가 극복해야 할 한계로 지적된다.

◇ "근거가 상당하고, 사안 중대" 판단한 인권위…'박원순 성추행' 사건 자체부터 조사

인권위는 30일 오전 제26차 정기 상임위원회를 열고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인권위가 밝힌 조사 범위는 '박 전 시장에 의한 성희롱 행위', '서울시의 묵인·방조 및 그것이 가능했던 구조와 제도 전반, '선출직 공무원에 의한 성희롱 사건 처리절차' 등이다.

인권위는 이번 사건을 '성추행'이 아닌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성희롱'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성희롱에는 위력에 의한 성추행·성폭력·강제추행·성적 괴롭힘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국가기관인 인권위는 법령에 따라 '근거가 상당하고, 사안이 중대한 경우로 인정할 때'만 직권으로 조사에 나선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인권위 상임위원이었던 정상환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직권조사는 조사관 개인이 아닌 인권위 차원의 위원들이 결정한다"면서 "직권조사를 결정했다는 것은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사안도 중대하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인권위가 이 사건에 대해서 두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해자가 제출한 자료의 신빙성도 당연히 있다고 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피해자 측은 인권위에 '직권조사 발동 요청서'와 함께 증거도 제출한 바 있다.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는 전날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취재진에게 "전부 성추행 관련은 아니지만 저희가 (인권위에) 직권조사를 요청하면서 제출한 증거 목록이 30개"라고 밝혔다.

이어 인권위의 직권조사 개시 결정으로 수사기관에 의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예정인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자체에 대한 진상규명도 일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서울시의 성추행 방조'와 '2차 가해' 등 주변 수사를 진행한 후 종합적으로 판단해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의 송치 시점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성추행 사건은 직접 수사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자료사진)
◇ '강제수사권 없음'은 예상되는 한계…인권위 "과태료 처분 등 방법 있어"

다만 인권위가 수사기관과 달리 압수수색 등 강제조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은 대표적인 한계로 꼽힌다. 통상 인권위는 당사자의 자발적 진술이나 임의제출된 자료에 의존해 조사를 진행한다.

이 같은 한계가 드러난 대표적 사례로 2년 전 서지현 검사의 '미투'로 촉발한 검찰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직권조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서 검사 측은 법무부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성추행과 인사보복 의혹을 조사해 달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해당 사건을 비롯해 검찰 전반의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직권조사' 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인권위는 검찰 내 성폭력이 발생했다고 의심되지만 징계 등이 이뤄지지 않은 사례 9건을 추가로 파악하고, 이 중 후속 조치가 없는 4건에 대한 조사를 시도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조사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피해를 부인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개별사건의 조사를 더 진행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로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한 바 있다.

게다가 수사기관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통상 '각하' 결정을 내려온 점도 문제다. 이번 인권위의 직권조사 범위에는 '성추행 방조' 등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도 있다.

다만 인권위는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권위 관계자는 "우리는 일단 큰 틀에서 조사하게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중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역량을 최대한 동원할 것"이라며 "따라서 (수사기관과) 겹치지 않게 조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어 강제수사권이 없어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료 제출을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인권위법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없이 '방문조사, 실지조사를 거부·방해·기피'하거나 '진술서 제출요구 또는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은 경우' 천 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할 수 있다.

조사 대상이 되는 사건과 관련해 증거를 인멸·위조·변조하거나 위변조 된 증거를 사용한 사람에게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규정도 있다.

◇ "이번 기회에 성범죄 처리에 관한 시스템 전반 조사해야"

지난 28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역 주변에서 한국성폭력 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8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촉구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전문가들은 인권위가 직권조사 나선 만큼 이번 기회에 서울시를 넘어 우리 사회의 성범죄 문제 처리 시스템 전반을 조사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놨다.

정 변호사는 "현재 수사가 진행중인 사건에 대해선 인권위가 조사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수사기관보다 인권위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여러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면서 "'수사' 범위에 대한 해석을 엄격하게 해서, 인권위가 여러 문제점에 대해 들여다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기회에 인권위가 조사에 나서서 서울시뿐만 아니라 정부부처든 사기업이든 재발방지를 위해 관련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인권위 혁신위원으로 활동했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명숙 상임활동가는 "인권위가 성희롱 시정기구로서 2005년부터 여성가족부로 이관받아 현재까지 해오는 등 경험과 노하우가 많다"면서 "중앙정부, 지방정부, 기업권력 등에서 독립된 인권위가 나서야 한다"고 의견을 내놨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단체들 또한 이날 인권위의 직권조사 결정 소식이 알려진 후 "인권위 결정을 계기로 본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인권회복에 박차를 가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며 "본 사건 및 본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성차별적 문화와 구조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충실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성 노동자가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는 세상, 문제가 발생하면 권리 회복을 위한 절차를 정당하게 밟을 수 있는 세상, 다시는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하는 세상, 이러한 상식이 실현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인권위, 서울시, 더 나아가 시민들 모두 함께 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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