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이 심은 '반도' 속 희망, 보통 사람들

[노컷 인터뷰] 영화 '반도'
폐허의 땅 반도, 그곳을 만든 자_연상호 감독 ②

(사진=NEW 제공)
※ 스포일러 주의

폐허의 땅 반도. 4년 전 가까스로 반도를 탈출한 정석(강동원)은 가족도, 삶에 대한 의지도, 희망도,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정석은 모든 것이 사라진 땅 반도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정석을 이끈 건 어쩌면 4년 전 그날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을, 위기의 순간에서 가족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들은 정석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때의 트라우마 혹은 부채감을 따라 반도로 왔다.

그리고 폐허에서 살아남은 민정(이정현)과 준이(이레), 유진(이예원), 김 노인(권해효)을 만난다. 좀비뿐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한 채 짐승처럼 변한 631부대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다. 민정 가족은 정석에게서 반도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정석 역시 그들을 통해 4년 전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놓아버린 '희망'을 다시금 자기 안으로 거둬들인다. 모든 것이 사라진 땅에서 말이다. 어쩌면 연상호 감독은 이들을 통해 붕괴한 세상에 남은 작은 희망과 인간들의 연대를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연 감독을 만나 '반도'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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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아니게 된 '좀비', 인간성을 상실한 '631부대'

'반도'라는 영화 제목이 가진 지정학적, 정치적 위치는 매우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반도는 전 세계가 버린 땅이 된다. 감염을 우려해 반도의 난민들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고립된 상황에 놓인다. 사실 바다로 둘러싸인 3면을 제외하면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반도 위로는 갈 수 없다. 바다 못지않은 넓고 깊은 장벽이 서 있기 때문이다.

"'반도'라는 제목이 좋았던 게 하나는 뚫려 있는데 막혀 있고, 막혀 있는데 그쪽이 사실 약간 벽 같은 느낌이 있죠. 그런 측면에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면이 존재하죠. 기획 단계에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어요. 생존자들이 휴전선으로 갈까 등 말이죠. 반도라는 배경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은 것 같아요."

지리적·정치적인 장벽으로 꽉 막힌 반도는 결국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는 극한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렇게 '반도'는 '부산행'의 KTX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반도라는 열린 듯 한정된 거대한 공간으로 돌아와 멸망 후 세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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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감독은 좀비 영화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좋아한다. '반도'에는 연 감독이 좋아하는 장르가 모두 담겨 있다. '반도'는 '부산행'(2016) 그 후 4년, 폐허가 된 땅에 남겨진 자들이 벌이는 최후의 사투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문명이 멸망한 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좀비물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인 거 같아요. '레지던트 이블'처럼 좀비를 크리처(창조된 생명체)화 하거나 아니면 '워킹데드' 후반 시리즈처럼 악으로 변화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거죠. '반도' 속 631부대원들은 일종의 '변종 좀비'라 할 수 있죠. 별다른 목표나 희망 없이 순간적인 자극만을 좇죠. 대표적인 인물이 황 중사(김민재)죠. 일종의 쾌락이라는 자극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사냥개 같은 631부대원들의 모습은 좀비와 다를 바 없어요."

631부대의 야만적인 모습이 가장 극대화된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숨바꼭질' 신이다. '들개'라 불리는 생존자들을 좀비들과 한 공간에 가둬두는 이른바 '생존게임'이다. 살기 위해, 물어뜯기 위해 쫓고 쫓기는 좀비와 인간 사이 치열함은 생존 현실의 축소판과도 같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삶 한가운데 있었던 631부대가 이제는 희망과 인간성을 잃고, 또 다른 생존자를 죽음의 생존게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인간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야바위(교묘한 수법으로 남을 속여 돈을 따는 노름의 하나)하는 집단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숨바꼭질 장면을 만들었어요. 관객이 숨바꼭질 경기장 안에 같이 들어가 그 상황을 1인칭으로 느꼈으면 했죠. 그래서 무술 감독님과 커트를 자르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액션 동선을 짰어요. 이틀을 찍었어요. 정말 고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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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의 땅을 헤쳐나가는 건 '보통'의 사람들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말하는 지점 중 하나는 인류가 놓치지 말아야 할 보편성이다. 시대를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현실과 인간을 비판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반도'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로서 보편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여러 작업을 하며 느낀 건 영화가 아주 힘들다는 거였어요. 드라마는 기획하고 최종적으로 시청자와 만나는 기간이 짧은 편이죠. 영화는 최소 2년이고 더 긴 경우도 있어요. 2년 후의 관객의 테이스트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죠. 그러다 보니 영화라는 걸 고민할 때 좀 더 보편적인,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을 보편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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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와 비슷한 부류의 좀비물이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을 보면 주인공에게 난국을 타개할 지식이나 능력 등을 주거나, 중요한 인물로 설정한다. '반도' 속 정석은 군인 출신이긴 해도 보통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연 감독은 "일단 주인공 자체가 탈출 후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반도로 들어간다는 설정이다. 관객이 주인공과 같이 반도로 들어가는 느낌이 중요했다"며 "정석은 일종의 '안내자'이자 관객의 한 명이다. 그런 포지션으로 뒀다"고 말했다.

정석과 반도를 탈출하려는 민정, 준이, 유진, 김 노인 역시 보통 사람들이다. 심지어 여성, 아이, 노인 등 약자들의 연대다. 결국 보통의 사람들이 만나 폐허의 땅을 헤쳐나가게 된다. 이들의 연대와 결말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한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가치는 극장을 나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관객들에게 우리가 발 디딘 곳을 '반도'의 시선으로 돌아보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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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미, 김 노인의 대사 또한 관객들의 발목을 다시 한 번 붙잡는다. 유진을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 김 노인은 이레와 유진에게 "미안해,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해서"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들이 현실의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표현하는 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다. 그만큼 현실이 지옥처럼 힘겹기에 나온 단어다. 이러한 현실에 비교했을 때 김 노인의 대사는 기성세대가 현 세대들에게 전하는 미안함처럼 느껴진다.

"저도 기성세대로 왔어요. 기성세대가 아이들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들이 사는 방식이 있기도 하고요.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염치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염치를 갖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기성세대일 수 있다는 생각에 김 노인의 대사가 잘 들어간 거 같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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