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장가의 최고 여행기 '열하일기'를 읽는 법

[북리뷰]기행문이자 문학서인 열하일기 나침반, 박수밀의 ‘열하일기 첫걸음’
박지원의 치독한 취재와 글쓰기,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 쉽게 풀어내
"연암이 꿈꾼 세상은 모두 함께 어울리며 차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

호기심 천국이자 취재 끝판왕, 겉으론 호탕했지만 사실은 고독하고 소심했던 남자, 변혁을 꿈꿨지만 허균처럼 무리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지킨 선비.

큰 산을 넘어가는데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출판사의 서평이 달린 박수밀의 ‘열하일기 첫걸음’(돌베개 펴냄)을 다 읽은 뒤 연암 박지원에 대해 든 생각이다.

얕잡아보던 오랑캐들로부터 치욕의 병자호란을 겪고 북벌(北伐)을 하고 싶었지만 가당찮았고 왕조를 보존하기 위해 사신단을 보내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시대의 선비 박지원. 그는 공식 관료가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사신단 대표인 팔촌 형의 추천으로 삼천리 긴 여정에 합류한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땅이었던 광대한 요동 벌판을 보며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 쓰고 깨진 기왓장이나 똥조차 알뜰히 활용하는 중국의 실용을 보고 장관이라고 한다.


연암은 ‘왜 하필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나무숲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풍광만을 장관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라고 통탄한다.

그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록하려 했고, 중국인을 만나면 무슨 질문을 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위대한 학자라도 만나면 무엇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할까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초조했다. 그래서 예전에 들어서 아는 내용 중 지전설과 달의 세계 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내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은 채 졸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풀어냈다. 무려 수십만 마디의 말,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 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 열하일기 곡정필담 중

밤은 위험하니 나다니지 말라는 게 사신단 내부 지침이었지만 연암은 꼭 말 안 듣는 기자처럼 밤거리로 나서 풍경을 메모하고 장사꾼들과 술 마시며 필담을 나눈다.

그는 소심하고 치기어리며, 화려한 도시의 군중 속에서 친구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감성파 ‘고독남’이기도 했다.

혼자 들른 험악한 분위기의 술집에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강한 척 술을 대접에 따라 원샷으로 마시고, 북경의 번화한 밤거리인 유리창에서는 화려한 불빛과 밀려다니는 군중을 보며 보잘 것 없는 조선 선비의 쓸쓸함과 고독을 씹기도 한다.

“나는 담뱃대로 작은 잔을 쓸어서 뒤집고는 큰 사발을 가지고 오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술을 모두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뭇 오랑캐들이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중략)단번에 넉 냥어치의 술을 들이마신 까닭은 저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실상은 겁이 나서 그런 것이지 진정한 용기는 아니었다” 열하일기 태학유관록 중

열하일기에는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허위의식과 구조적인 가난과 차별을 없애고 더불어 평등하게 잘 살자는 주제의 소설 ‘허생전’과 ‘호질’도 실려 있다.

연암은 중국 가게에서 베끼거나(호질) 남에게 들은 것(허생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척 소설로 남겼는데, 당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변혁과 이상사회를 꿈꾸면서도 글로 인한 파문이 본인의 안위를 해치는 것을 교묘히 피해가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실제 현장을 보는 듯 생생하고 파격적인 문체, 당대의 폐단을 지적하는 비판의식이 농후한 열하일기는 나오자마자 큰 사회적 이슈가 됐고 왕인 정조가 꾸짖어 수정할 것을 명하는 등 파문을 일으킨다.

그래도 연암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글을 수정하지 않고도 목숨을 보전한다. 홍길동전을 통해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그린 한참 윗대의 선배 허균이 결국 역모죄에 걸려 능지처참 당한 것과 비견된다. 치열하되 조금 비겁했거나 더 전략적인 선비였거나…

대화하기 좋아했던 연암은 본격 외교관이 됐어도 잘했을 인물이다.

연암은 청나라 시대임에도 대놓고 중국 관리들에게 명나라 시대가 그립지 않느냐고 묻거나 현재의 정세를 묻는데 급급한 조선의 관리들을 가차없이 꾸짖고는 이렇게 얘기한다.

“겸소한 마음으로 배움을 청하여 마음 놓고 이야기를 터놓도록 유도하고, 겉으로는 잘 모르는 것처럼 가장해서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면 그들의 눈썹 한번 움직이는 데서도 참과 거짓을 볼 수 있을 것이요. 웃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실정을 능히 탐지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종이와 먹을 떠나서 그들의 정보와 소식을 대략이나마 얻을 수 있었던 방법이다” 열하일기 심세편 중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문체로 역사와 철학, 경제, 사회, 정치를 아울러 논하고,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꿨던 연암의 사상이 잘 녹아들어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꼽히는 글이다.

저자는 열하일기를 읽는 방법에 대해 “연암 박지원이 여행길에서 만난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감수성으로 대했는지 주목하고 작은 것을 다르게 보는 연암의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 열하일기를 박진감 넘치는 모험 서사로 읽어볼 것과 연암의 비유와 상징을 찾아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연암이 꿈꾼 세상은 모두 함께 어울리며 차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도 지속될 화두다.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닥칠 폭염. 비슷한 시기 열하를 찾아 하루에 몇 개의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관찰하고 취재하며 새 세상을 꿈꿨던 연암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열하일기를 읽을 계획이 있거나, 다 읽지는 못해도 열하일기가 어떤 책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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