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희롱 언어폭력 중징계 이상 무관용 원칙 적용"(2014년 9월 26일)
"서울시, 직장내 성희롱·언어폭력에 강력한 인사조치 시행"(2018년 4월 25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지난 2011년 제35대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이후 서울시가 내놓았던 굵직굵직한 '직장내 성희롱' 관련 대책들이다. 최근에는 서울시 직원들 사이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난 5월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재발방지 종합대책'을 추가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책은 '시장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시장의 성희롱·성추행은 뿌리 뽑히지 않고, 무관용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강력한 인사조치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까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권력형 성범죄'의 이면에는 통제받지 않는 '제왕적 권력'이 자리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매뉴얼'상 성범죄 사건 최종 책임자는 '시장님'
"인권담당관은 성희롱·성폭력 고충사건의 결정에 따른 이행결과를 점검, 시장에게 보고한다"
'2020년 서울시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는 서울시 내에서 성범죄가 발생한 경우 시민인권보호관의 조사를 거치도록 돼 있다. 이후 결과를 보고받은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가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를 결정한 뒤, 인권담당관이 최종적으로 결정 및 이행결과를 시장에게 보고한다.
매뉴얼만 보면 성범죄 행위자가 시장인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보고받는 것은 결국 시장인 셈이다. 매뉴얼 어디에도 시장이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상정하고 규정된 내용은 없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장님도 서울시 공무원인 만큼 매뉴얼의 적용 대상"이라면서도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만약을 가정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매뉴얼에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사건의 처리를 원하는 피해자, 대리인, 목격자 등은 고충상담원, 인권담당관에 전화, 온라인, 서면, 방문 등으로 상담 신청, 신고, 제보를 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누구든지 서울시 내에서 성범죄를 인지했다면 이를 알렸어야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행위자가 시장일 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A씨 측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피해 사실을 여러 차례 주변에 호소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상급자 등 서울시 내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단순 실수로 받아들여라', '비서의 업무는 시장의 심기를 보좌하는 역할이자 노동'이라고 일컫는 등 오히려 사소한 일로 치부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가 5월 내놓은 대책에는 "사건 발생시 온정주의로 인해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잘못된 관행 존재. 이로 인한 사건처리 지연, 은폐·축소 문제 등 발생"이라고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시장님'에 관한 문제에선 객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혹여 매뉴얼이 박 전 시장을 대상으로 작동했더라도 곳곳에는 '지뢰'가 숨어 있다. 사안을 처리하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는 서울시 직원 등 내부위원과 성범죄 전문가 등 외부위원을 동수로 구성한다. 그런데 외부위원을 '시장이 위촉'한다. 매뉴얼대로 하더라도 시장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것이다.
◇여가부 매뉴얼도 '시장님' 적용에는 '한계'
정부 부처에도 공무원 성범죄에 관련한 여러 매뉴얼이 존재했지만 마찬가지로 '시장님'에겐 적용되기 어려웠다.
여성가족부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등 권력형 성범죄가 잇따르자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과 함께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때 '공공기관의 장'은 공기업, 공사, 정부 업무 위탁 기관 등 '공직 유관단체'의 장을 의미할 뿐 지자체장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상 지자체장이 이들보다 더 권력이 세지만, 따로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지자체장의 경우도 원칙적으로는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의 적용 대상이다"면서도 "한 번도 선출직 공무원에 대해서는 적용이 된 적이 없는 등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자체의 상급기관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해당 기관의 장이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내부에서는 사건 처리가 미숙할 여지가 많아 즉시 '상급기관'에 사건을 인계해 처리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서울시와 같은 지자체는 상급기관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여가부 관계자는 "지자체의 상급기관을 어디로 볼 것이냐에 대한 법적 해석이 없다"면서 "'주무부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선거에 의해 장을 뽑는 지자체의 경우 주무부처가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많다"고 말했다.
여가부 황윤정 권익증진국장이 전날 브리핑을 통해 "대책을 보완하겠다"고 밝혔지만, 안희정 전 지사를 필두로 오거돈 전 시장을 거쳐 박원순 전 시장까지 약 2년 4개월 동안 시장님들의 권력형 성범죄가 잇따르면서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 "피해자는 권력자가 어떻게 힘쓸지 알아 신고 못 해…외부 기구 필요"
전문가들은 잇따른 지자체장의 권력형 성범죄의 본질이 '제왕적 권력'에 있음을 지적하며 정부가 보여주기식 매뉴얼 제정이 아니라 실제 현실을 반영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 피해자 법률대리를 맡았던 서혜진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지자체장이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에는 이들의 제왕적인 권력 행사가 있다"면서 "이번 사건에서도 드러났지만 그들 주변에는 늘 조력자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직 내 권력형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수사기관 등에 신고에 나서기는 굉장히 어렵다. 권력자가 누구와 친분이 있으며 어디에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라며 "피해자는 정말 갈 곳 없이 막막하다. 지자체장에게 별도로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이나 기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울시는 외부에서도 벤치마킹을 많이 할 정도로 매뉴얼이 정말 잘 돼 있다"면서도 "그것이 왜 현실에서, 지자체장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을까를 제대로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대한 신고를 의무화 하고 독립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사건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지금껏 매뉴얼의 실효성이 없었던 이유는 기관장에게 보고하고 내부에서 처리하려고 하니까 은폐하려는 유인이 컸기 때문"이라면서 "만약 기관의 장에 대한 컴플레인이 생기면 담당자가 인권위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등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