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비건 부장관의 발언이 원론적이며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북한이 당장 호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남북협력에서 한국의 독자성을 인정한 셈이어서 상황 타개의 단초는 될 수 있다.
◇비건, 국내 비판여론 의식한 듯 "남북협력 강력 지지"
비건 부장관은 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협의를 마친 뒤 약식 회견에서 "미국은 남북협력을 강력 지지하며 남북협력이 한반도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가 남북협력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도 덧붙였다.
특히 한미워킹그룹은 북한이 "남북관계의 족쇄"라며 반발하고 국내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해체 주장이 나오는 등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부각되고 있다.
이와 관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이도훈 본부장이 지난달 미국 방문 때 워킹그룹에 대한 문제의식을 미국 측과 공유했고 운영방식 개선 등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고 전했다.
◇워킹그룹 개선 청신호?…이날 회의에선 구체적 협의 없어
따라서 비건 부장관의 유연한 입장 표명은 워킹그룹의 족쇄 기능을 푸는 청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한미 협의에서 워킹그룹 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국자는 "이도훈 본부장이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이후 남북 간에도 중요 현안들이 많이 생겼다"며 아직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 단계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비건 부장관의 발언이 립 서비스에 그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비건 부장관의 이날 남북협력에 대한 지지의 강도가 과거에 비해 훨씬 세지긴 했지만 구체적 내용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북한으로서는 제재완화나 체제안전 같은 알맹이 없는 대화 제의에 선뜻 응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비건 부장관이 균형 잡힌 합의와 유연성을 언급하긴 했어도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북한으로부터 좋은 평가의 담화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비건 부장관의 이날 발언은 실제 북한과의 대화 추진보다는 상황 관리에 의중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건 부장관이 이례적으로 길게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에 대한 불쾌감을 표출한 것이 그 반증이다.
그는 북한이 자신의 방한에 앞서 북미회담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은 것에 대해 '나는 회담을 요청한 적도 없는데 왜 그러느냐'는 식의 핀잔을 준 뒤 "나는 최 부상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쏘아붙이듯 했다.
추후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배포한 자료에선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다"고 비판 강도를 높였다.
그는 또 북측의 협상 카운터파트(상대역)이 도대체 누구인가를 물으며 자신과의 만남을 계속 피하고 있는 최선희 부상에 대해 일종의 보이콧 반격을 가했다.
이는 북미협상 중단의 책임을 북측에 넘김으로써 미국 대선 전에 혹시 있을지 모를 북한의 도발 명분을 없애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실제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올 것으로 기대하기 보다는 북한 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메시지 차원"이라며 "이는 비건 부장관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도움이 된다면'이란 전제를 달고 3차 북미정상회담을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된다.
다만 한미 양국이 이번에 "대화와 협상만이 (북핵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란 점을 재확인하고 남북협력 중요성에 공감한 것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어차피 트럼프 행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미국 밖으로 눈을 돌리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운신의 폭이 다소나마 커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차기 미국 행정부의 향배와 상관없이 대선 국면에서 남북협력의 공간을 최대한 넓혀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은 최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대선 전) 북미 정상회담을 문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북미 정상회담이라도 중재하는 식으로 하면서 남북관계를 복원하려고 하는, 그런 소위 숨은 뜻이 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