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민아가 9건의 글을 올려 자신이 당한 괴로운 일을 주장할 때, 오랜 기간 두 사람이 몸담았던 FNC엔터테인먼트는 '공식입장 없음' 상태로 이틀을 보냈다. 가해자로 지목된 지민이 "팀을 이끌기에 인간적으로 많이 모자랐던 리더인 것 같습니다"라며 "저희 둘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해줬던 우리 멤버들과 민아에게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사과문을 올리고 나서야, 지민의 탈퇴·연예 활동 중단을 알리는 공식입장을 밤늦게 발표했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특정 그룹의 '유난스러운 불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뷔해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필수 과정이 된 연습생 제도와 합숙 생활, 그룹 내부에 존재하는 위계, 갈등을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소속사의 소극적인 태도 등 'K팝 산업'과 '아이돌 육성 시스템'의 그늘이 다시 한번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이돌 연습생의 땀과 눈물'의 저자인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피해자가 어떤 방식으로 피해 사실을 폭로했는가를 보면, 언론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다. 소속사나 멤버들에게 이야기해도 문제가 해결될 거란 기대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폭로한 것 같다. 거의 10건의 글을 올렸다는 점도 그간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라며 "지민의 폭력적 행동이나 따돌림뿐 아니라 아버지 건강이 위중한 상황에서도 병문안 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는 건 소속사의 심각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종임 이사는 "소속사가 꼬리 자르기 식으로 가해자 탈퇴 결정을 한 데에는, 민아의 SNS 글과 지민의 글을 실시간으로 중계할 뿐 이 문제를 진지하게 진단하지 않은 언론의 태도도 한몫했다고 본다"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멤버를 탈퇴시키는 것은 문제를 봉합하는 방식이기에 오히려 문제를 재발시킬 수 있으며, 남은 멤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라고 우려했다.
대중문화 저널리스트 박희아씨는 "학교나 직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보다 더 작은 커뮤니티에서 일어났다. 소속사는 '관리자' 입장에서 수시로 (멤버들에 대한 내용을) 보고받는데 이것만 몰랐다고 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그간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중재 노력을 했는지 충분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이 거센 것 같다. 이런 태도는 길게 봤을 때 다른 소속 아티스트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칼럼니스트 이승한씨는 "피해가 지속해 발생하고 회사가 이를 인지했음에도 아무 조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후 대처도 기습적으로 멤버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회사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라며 "조직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가해자 한 사람만의 문제로 축소해 그 사람만 축출하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구는 것도 굉장히 전형적인 그림이다. 개인의 비행은 조직 전체의 모순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라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선에 나설 때"라고 지적했다.
권민아는 아버지의 암 투병 중에도 그룹 활동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본인 감정을 통제해야 했다고 썼다. 지민은 사과문에서 여러 차례 '리더로서 부족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활동기에는 24시간 같이 있어야 하는 환경, 팀 멤버들이 각자의 역할에 부담을 느꼈다는 점, 나이나 위치에 따른 서열이 굳어진 문화, 무엇보다 이 같은 팀 내 괴롭힘이 계속되어도 드러낼 수 없는 암묵적인 상황 등 아이돌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아이돌 시스템 구조가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승한씨는 "적은 인원의 엘리트를 데리고 호흡 맞춰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합숙하고, 리더를 정하고, 통금이나 개인물품 소지 금지 등의 엄격한 규율을 만들고, 그를 어기면 혼을 내는 게 한국의 엘리트 체육과 아이돌 산업이 공유하는 구조다. 사실상 병영문화의 잔재"라고 말했다.
이어 "멤버들이 합숙을 하지 않고 연습이 끝난 뒤에 각자 자기 생활을 했더라면, 혹은 합숙을 했더라도 자기 공간이 충분히 확보된 상황에서 서로 불편한 사람들끼리는 안전거리를 두고 지낼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종임 이사도 "숙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문제적 행동을 하는 멤버와 피해를 본 멤버를 위해 외부 상담 시스템을 활용해야 한다. 소속사가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라며 '합숙 생활', '소속사의 통제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아이돌은 다른 커뮤니티가 부재한 채 주로 멤버와 소속사 관계자만 만난다. 가족과 만나는 시간도 정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며 "연애·SNS 금지 등 사생활 관리와 통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기획사의 할 일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박희아씨는 "신인 개발 부서를 비롯해 매니지먼트 관계자들이 주기적으로 인권 교육을 받고, (관련 내용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연습생 대다수가 청소년이므로, '어른'들이 모인 소속사가 단체 활동 중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과정 없이 '너희 한 팀이니 친하게 지내'라고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꼬집었다.
아이돌을 향한 시각 변화, 존중하는 태도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 이사는 "아이돌 가수를 '상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음악 활동을 하는 창작자이자 예술인이라는 점을 고려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박희아씨는 "몇 년씩 활동을 함께하는 아이돌 사이 불화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한편으로 대중은 아이돌에게 '해맑고 명랑한' 이미지를 원해 그런 갈등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직업인으로서 겪는 다양한 고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또는 연습생) 표준 부속합의서'와 '대중문화예술분야 연습생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지난해 3월과 11월부터 시행했다. 전자는 "청소년의 권익을 보다 명확하게 보호하고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자유선택권 △학습권 △인격권 △신체적·정신적 건강 △수면권·휴식권을 보장한다. 후자 역시 기획업자가 연습생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우울증세 등이 발생할 시 본인 동의 아래 치료를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019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표준 부속합의서에 관해 잘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은 38.6%,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은 32.8%,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28.6%였다. 잘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은 매니지먼트 분야(41.2%), 소속 직원 수 10인 이상인 경우(48.2%)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