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라인]6·25 발발에서 분단까지…다시보는 전쟁史

1954-04-26
'한반도 평화협정' 성과 없었던 제네바 회담 
'한반도 평화협정' 성과 없었던 제네바 회담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부터 시작됐다. 정치적 협상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취지로 1954년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미국, 소련, 중국 등이 참여하는 정치회담이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87일 만에 막을 내렸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는 정전협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지만, 남북 양측의 정전협정 준수 의지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남북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비무장지대(DMZ)에 중화기를 배치하기까지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정전 이후 1994년 4월 말까지 정전협정 위반건수는 42만여 건에 달한다. (사진=연합뉴스)


1953-07-27
'휴전' 한국전쟁 끝나다
'휴전' 한국전쟁 끝나다
그동안 전선에서는 쌍방의 휴전전략과 연관된 전투가 거듭됐으나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6.25전쟁은 발발된 지 3년 1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됐다. 다만 한국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1953년 7월 27일 휴전의 발효와 더불어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사진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모습. (사진=연합뉴스)


1953-06-18
이승만, 반공포로 2만 6천명 석방
이승만, 반공포로 2만 6천명 석방
6월 8일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는 귀향을 원하는 포로를 휴전 성립 후 60일 내에 송환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6천명을 석방시킴으로써 회담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펑더화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휴전회담 이후 가장 강력한 공격작전인 '7.13 공세'를 취함으로써 한때 위기국면을 맞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원 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휴전을 성립시켰다. 사진은 포로 교환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와 테일러 장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1953-03-05
소련, 스탈린의 사망
소련, 스탈린의 사망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됐다. 사진은 박수를 치고 있는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진=연합뉴스)


1953-01-20
'전쟁종결 공약' 아이젠하워 美대통령 당선, 휴전논의 급물살
'전쟁종결 공약' 아이젠하워 美대통령 당선, 휴전논의 급물살
휴전회담에서 가장 큰 난제로 부각된 의제는 포로문제였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은 강제송환을 각각 주장함에 따라 협상은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했다. 사진은 대통령 당선자 시절의 아이젠하워. (사진=연합뉴스)


1951-08-01
소모적 전투 반복…휴전협정 체결까지 이어진 교착상태
소모적 전투 반복…휴전협정 체결까지 이어진 교착상태
양측은 별도의 협의가 없는 한 군사작전은 계속한다고 했기 때문에 회담 기간 중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고,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됐다. 이때부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심리적인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대규모 공격과 철수작전은 없었다.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야말로 휴전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 여간 지속됐다. 휴전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쟁탈전을 수행했다. 주요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을 전개,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손실을 냈다. (사진=연합뉴스)


1951-07-10
개성서 휴전회담 돌입
개성서 휴전회담 돌입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양측은 최초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를 비롯해 휴전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을 벌였다. 사진은 개성 휴전협상 회담 당시. (사진=연합뉴스)


1951-06-23
휴전 위한 정전회담 개최 합의
휴전 위한 정전회담 개최 합의
중공군의 5차공세가 종료될 무렵인 1951년 6월 3일 조지 케난이 휴전을 위한 미·소 회담의 개최를 제의했고, 6월 23일 조·중연합군측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를 통해 호응함으로써 정전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1951-04-22
중공군 춘계공세…유엔군 화력도 최대 동원
중공군 춘계공세…유엔군 화력도 최대 동원
연합군의 서울 재수복 무렵, 중공군은 만주의 추가부대가 투입되고 원산부근의 부대도 전선으로 합류함으로써 총 51개 사단으로 증강됐으며 이들은 4월 22일 다시 5차 공세를 시작했다. 춘계공세에는 공산군의 병력과 유엔군의 화력이 최대로 동원됐다. 이들은 4월에 서부전선의 개성-화천 방면에, 5월에 동부전선의 양구-인제 방면에 각각 전력을 집중시켜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당해 저지됐으며,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해 6월 15일 문산-철원-김화-화천-간성을 잇는 지역을 점령했다. 이때 유엔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반격을 중단한 것은 전전의 원상복구 상황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사진은 연합군에 붙잡힌 중공군. (사진=연합뉴스)


1951-03-16
수도 서울 재수복, 전장의 주도권 장악
수도 서울 재수복, 전장의 주도권 장악
1·4 후퇴는 6·25전쟁 발발 때와는 달리 미리 준비돼 있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뤄졌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반격작전을 개시했으며, 2월 한강남쪽까지 진출할 무렵 다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아군은 지평리-원주선에서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반격을 계속해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2개월만에 전장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한 것으로 중공군 개입으로 팽배했던 '패배심리'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 후 서울 도심 모습. (사진=연합뉴스)


1951-01-04
통한의 1·4 후퇴…중국 공산군, 서울 다시 점령
통한의 1·4 후퇴…중국 공산군, 서울 다시 점령
1950년 11월 북한공산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공산군의 두 차례 공격은 국군과 유엔군을 압록강·두만강선에서 후퇴하게 했다. 1951년 1월초 중공군은 3차 공세에 나서 주공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연천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서울을 압박했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공산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방어가 어렵게 됐고,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Ridgway,M.B.)중장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했다. 한국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으며 1월 4일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됐다. (사진=연합뉴스)


1950-11-24
'참혹한 패배' 크리스마스 대공세 실패
'참혹한 패배' 크리스마스 대공세 실패
애초에 연합군의 목적은 북한군을 38선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북진'은 아니었다. 중국 역시 연합군이 북진을 지속한다면 침략행위로 규정하겠다고 경고했고, 중공군이 이 무렵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중국의 대규모 참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해 11월 24일 북진했다. 결과는 연합군의 대참패였으며 특히 장진호 전투에선 매복해 있는 적들에게 포위돼 섬멸 당했다. 이후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37도선까지 후퇴했다. 크리스마스 대공세는 '크리스마스 전에 미국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미군 내 낙관적인 무드에서 비롯됐다. 사진은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전투장면. (사진=연합뉴스)


1950-10-19
'파죽지세' 연합군, 마침내 평양 점령
'파죽지세' 연합군, 마침내 평양 점령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분위기는 급반전됐고 국군과 유엔군(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넘었고 10월 19일 마침내 평양을 점령했다. (사진=연합뉴스)


1950-09-15
'전세 역전' 인천상륙작전 성공
'전세 역전' 인천상륙작전 성공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 다만 10월은 기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였다. 이미 6월 29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해 전쟁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사진은 웃고있는 맥아더 장군. (사진=연합뉴스)


1950-08-01
낙동강 후퇴…최후 보루는 '낙동강 방어선'
낙동강 후퇴…최후 보루는 '낙동강 방어선'
개전 후 국군은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해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했다. 7월 한달간 유엔군 소속 미군은 북한군에게 계속해서 패배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부산점령을 목표로 한 북한군의 8월·9월 공세를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겹게 막아냈고, 결국 낙동강 방어전투는 후퇴에서 반격으로의 대전환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낙동강 방어전투 참가한 소년병들. (사진=연합뉴스)


1950-07-01
'유엔군' 스미스 특임대, 한국 상륙
'유엔군' 스미스 특임대, 한국 상륙
미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해당 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들은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사진=연합뉴스)


1950-06-28
수도 서울, 사흘만에 함락
수도 서울, 사흘만에 함락
개전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됐고 정부와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사진은 전쟁으로 텅 빈 서울거리. (사진=연합뉴스)


1950-06-27
이승만의 피신
이승만의 피신
북한이 기습남침을 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피신의사를 밝혔지만 무초 대사는 '군방어 능력 상실'을 우려해 이 전 대통령의 피신을 반대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서울 사수와 철수 문제를 놓고 밤샘 토론이 이어지던 6월 26일,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 피신을 공식 결정했고 27일 새벽 서울을 빠져나갔다. 찬반투표로 '서울 사수'가 결정돼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땐 이미 이 전 대통령은 없었다. 사진은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1950-06-25
일요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
일요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242대의 전차를 앞세워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했고, 서울 상공엔 YAK전투기가 침입해 김포 비행장을 폭격했다. 미국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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