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부 아이 '출생 등록권' 첫 인정…'사랑이법'이 놓친 것

미혼부가 키우는 자녀 1만여명
출생신고 어려워 사회복지 시스템 '사각지대' 발생
'사랑이법' 통과됐지만…법원, 법 조항 엄격히 해석
"대법 판결 계기로 법 일부 개정해야"

(사진=자료사진)
태어났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아이들이 있다. 미혼부 손에 크는 아이들이다. 미혼부들은 그동안 아이의 출생을 신고해도 반려되기 일쑤였다. 영화 '가버나움' 속 12살 자인처럼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은 의료·교육·복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그 후 5년, 미혼부 아이의 '출생 등록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최근 중국에서 귀화한 A씨가 중국 국적의 여성 B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출생 등록을 인정해달라며 낸 신청 사건에서 하급심의 판단을 뒤집고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판결에서 "아동의 사회적 신분을 박탈하고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혼부들은 대법원의 전향적 판결을 환영했다. '아품' 김지환 대표는 "출생신고 법체계가 미혼부 자녀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이 아이들에게도 동등한 인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법원 판결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번 판결을 계기로 관련 법 개정과 행정 절차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아이들은 왜 '유령' 취급을 받게 됐나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홀로 키우는 아빠들은 8424명. (통계청 2017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미혼부가 키우는 자녀는 1만여 명으로 나타났다.

미혼부가 혼자 출생 신고하는 방법을 간소화한 '사랑이법'(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이 지난 2015년 통과했다. 가족관계등록법 57조 2항은 '모'의 성명, 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 생부는 '내 자녀가 맞다'는 내용의 인지허가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여전히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 법으로 출생신고에 성공한 경우는 지난 5년간 14%에 그쳤다. 아이들은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어린이집도, 병원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법원이 '엄마의 성명·등록기준지·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라는 법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해서다.

미혼부가 법원에 유전자 검사표를 제출하고 아이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명해도 '생모의 인적사항 중 일부를 안다'는 이유로, '친모를 특정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미혼부들의 출생신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미혼부들에게 친모와 연락이 두절됐고 추적도 어렵다는 것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을 요구해왔다고 한다.

법무법인 어필 전수연 변호사는 "3가지를 다 몰라야 이 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3가지 중 하나만 몰라도 적용할 수 있는지 법원끼리도 의견이 달랐다"고 전했다. 아품 김지환 대표는 "전반적인 상황상 친모를 특정할 수 있다고 볼 때 기각하는 개념이었다"며 "아이의 상황이 아닌, 낳아준 엄마·아빠의 상황만 보고 주민등록번호를 줄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대법원 판결을 받아낸 A씨 역시 딸의 출생신고를 번번이 거부당했다. 미혼부는 아이가 다른 사람의 친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 엄마와의 혼인관계증명서를 내야 한다. 하지만 A씨는 아이 엄마가 외국인이어서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A씨는 법원에 친생자 출생 신고를 위한 확인을 받으려 했지만, 1·2심에서 거부당하자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사진=연합뉴스)
◇ '사랑이법' 조항 폭넓게 해석한 대법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사랑이법' 조항을 폭넓게 해석했다.

가족관계등록법 57조 2항에 대해 "문언 그대로 '엄마 이름·주민등록번호·등록기준지 전부나 일부를 알 수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엄마가 소재 불명인 경우, 엄마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 신고에 필요한 서류 제출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도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아울러 이 사건처럼 "엄마가 외국인이어서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이유로 출생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출 수 없는 경우도 포함한다"고 판시했다.

미혼부들은 이번 판결이 추후 유사한 소송들에 확대 적용할 수 있는 '근거'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품 김지환 대표는 "태어난 아이가 소송을 통해 기본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본권 평등권 침해인 건 변함없다"며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추가 법 개정과 행정절차 구체화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가족관계등록법을 일부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랑이법'이 끌어안지 못한 아동들을 출생신고 영역으로 끌어들이자는 취지다.

◇ 관련 법안 20대 국회서 '폐기'…법 개정 움직임 있을까

지난 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다수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혼외 자녀에 대해 모뿐만 아니라 부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부가 모의 성명, 등록기준지, 주민등록번호를 아는 경우에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출생신고의 기재사항에서 '혼인 중의 출생자와 혼인 외의 출생자의 구별'을 삭제한다'는 내용 등이 주를 이뤘다.

'출생 통보제' 등 보편적 출생신고가 하나의 대안으로 꼽힌다. 출생 통보제는 출생신고 의무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국가기관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직권으로 등록하는 방안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해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도 8년 전 "모든 아동이 차별 없이 출생 등록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는 지난달 8일 국내 의료기관에서 출생한 모든 국내 아동을 누락 없이 국가기관에 통보하도록 하는 출생 통보제 도입을 권고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적법과 가족관계등록법 예규 사이 괴리도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국적법에 따르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한국 국적이면 태어난 아이도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돼 있다. 하지만 가족관계등록법 예규는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 사이 혼외자인 경우 통상적으로 엄마의 국적을 따르게 돼 있다. 출생 등록이 돼도 아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법무부 장관 허가가 필요한 귀화 신청을 별도로 해야 한다.

가족관계등록법 46조 4항은 '신고의무자가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아 자녀의 복리가 위태롭게 될 우려가 있는 경우 검사나 지자체장이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의무가 아닌 재량규정인 탓에 지자체장 등이 이를 이행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법률구조1부장은 "사랑이법으로는 모든 아이를 포함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은 국적을 불문하고 출생등록이 되도록 하는 '보편적 출생신고'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수철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기본권 보장 취지에 따라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요건이 완화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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