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인천 서구 지역사무실에 만난 더불어민주당 김교흥(인천 서구갑) 국회의원이 등원에 앞서 밝힌 포부다.
김 의원은 지난 4‧15 총선이 본격 시작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주목받던 정치인이다. 17대 국회의원이 된 후 18~20대 총선에서 상대후보였던 이학재 전 의원에게 내리 패배하면서 4번째 리턴매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두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 김교흥의 '정치 인생 2막'
그의 정치 인생에 있어 이번 등원은 그의 '정치 인생 2막'인 셈이다. 등원을 앞둔 김 의원이 30년 가까이 달려온 정치 인생에 대한 소회와 21대 국회에서의 포부를 들어봤다.
12년 만에 다시 국회로 돌아가는 김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말했다. 낙선 뒤에도 민주당 기획단장, 인천시 정무부시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국회 사무총장 등 제법 비중있는 자리를 거쳤지만 아직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한 지역구에는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김교흥 1호 발의 법안은 '유료도로법·부가가치세법 개정안'
김 의원의 1호 발의 법안은 지역구와 관련해서는 '유료도로법 개정안', 지역구와 관련하지 않은 법안으로 '부가가치세법 개정안'이다. 전자는 중구 영종도와 서구 청라국제도시를 잇는 제3연륙교의 통행료를 인천‧영종대교의 손실보전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발의할 계획이다. 후자는 사실상 대중교통수단이 된 고속버스의 부가가치세 부과를 면제하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다.
김 의원은 등원에 앞서 최근 지역 정치인과 학자,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공약이행실천단'을 꾸렸다. 자신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언을 듣기 위해 만들었다. 지난 17대 국회 당시 자신의 공약이행률인 93%를 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 나의 스승 故 조철구 의원, 선배 정세균 국무총리
그는 주민들의 부름을 받지 못했던 지난 12년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스승과 선배 그리고 부모님을 꼽았다. 스승은 김 의원의 첫 정치권 진출을 이끌었던 고 조철구(1937~1996) 국회의원이고, 선배는 최근까지 김 의원이 보좌했던 정세균 국무총리다. 조 전 의원은 의문사한 장준하(1915~1975) 선생의 사망 후 검안의로서 타살 의혹을 제기한 인물이다.
김 의원은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기 전 조 전 의원을 수행하면서 공명심과 정의, 주민과의 관계 등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조 의원보다 '조 박사님' 호칭이 더 친근하다고 했다. 또 "정치는 국민의 눈에 흐르는 고통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조 의원의 유지를 이어받아 평생 인천 서구에서 정치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설명했다.
정 총리로부터는 정치인으로서의 균형감과 정직함, 진솔함 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자했다. 야학을 하던 친구의 소개로 아직 정계에 입문하기 전의 정 총리를 만난 김 의원은 이후 20여년 동안 여러 번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일을 하며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듣는 정치'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김 의원이 심적으로 가장 힘들 때 찾은 곳은 부모님 산소와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여주시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의 유일한 재충전 방식으로 지난 21대 총선 때도 수행원 몰래 2번이나 부모님 산소와 초등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 "'19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인천 5·3항쟁 재조명 돼야"
정계에 입문하기 전 김 의원은 정치마케팅업체인 A&T 대표를 지낸 정치광고 1세대 사업가였다.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1등 선거전략'을 출판했다.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이부영, 박찬종, 서청원 등의 선거전략과 분석을 담은 이 책은 당시 정치권에서 선거 관련 참고서로 정치권에서 인기를 끌었다.
김 의원의 역대 총선 전적이 5전 2승이었던 걸 감안하면 다소 모순적인 제목인데 김 의원은 "책을 쓴 이후에야 진짜 정치를 경험했다"고 술회했다.
김 의원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법안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꼽았다. 이 개정안은 민주화운동 정의 규정에 누락돼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인천 5‧3 민주항쟁'의 법적 지위 인정을 담고 있었다.
5·3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시민회관에서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경찰과 충돌한 사건이다. 129명이 구속됐고 1980년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 시위로 1년 뒤 발생한 1987년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다. 인천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 의원은 5‧3항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된 이력이 있다.
그는 이번 21대 국회 활동의 좌우명을 총욕불경(寵辱不驚)으로 정했다.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치활동에 있어 이해와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정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선거기간 내내 일 잘하는 의원이 되겠다고 약속했다"며 "약속대로 제대로 일하는 정치인이 되겠으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교흥 국회의원과의 일문일답.
-. 당선 이후 40여일이 지났고 등원을 앞두고 있다. 당선 이후 등원 전까지 근황을 말해달라.
=. 선거 끝나고 40여일 동안 하루도 못 쉬었다. 당선 인사를 다닌 뒤 곧바로 지역 현안을 추려봤다. 얼추 40여개의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인천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본부, 서구청, 인천도시공사 등 정말 많은 기관과 간담회를 가졌다. 큰 현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지 방향을 세웠다.
지역구인 서구 관련 현안 대부분이 10년 이상 방치된 게 많았다. 그동안 말로 공방만 벌였지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주민들 보기가 죄송스럽다. 제대로 일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지역 구의원과 전문가 집단, 학자 등으로 구성된 '공약이행실천단'을 꾸렸다. 첫 회의도 마쳤다.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을 가까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누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지역 현안은 알아서 풀어갈 계획이다. 지난 17대 당시 내 공약이행률이 93%였는데 이를 뛰어넘고 싶다.
-. 17대 국회의원 이후 원외에서 활동한 시기가 길었다. 정치권 진출 이전의 이력도 많지 않은 편이다. 정계 진출 전 이력을 알려달라.
=.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80학번으로 입학했다. 1985년에는 인천대 총학생회장을 맡았고 그 해에 5‧3민주항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졸업 이후에는 전공을 살려 1991년에 정치마케팅회사를 차렸다. 정치 마케팅 사업 1세대에 속한다.
-. 5‧3항쟁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 1986년 5월 3일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 결성대회 개최장소인 인천시민회관에서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벌인 시위다. 당시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는데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987년 6‧10민주항쟁의 불씨가 된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100명 넘는 시민들이 구속됐다. 나도 그들 중 1명이었다.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안타까운 사건이다.
지난 20대 국회 때 이 5‧3항쟁도 민주화운동으로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안이 발의됐는데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매우 아쉽다. 5·3항쟁은 민주화운동 정의 규정에 누락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항쟁을 더 적극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 저서 가운데 '1등 선거전략'이 눈에 띈다. 정치마케팅업체 대표시절 낸 책인데 사연을 알고 싶다.
=. 대학과 대학원 마친 뒤 정치 컨설팅과 평론가로 지냈다. 이 책은 대학원 졸업한 뒤 만든 책이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에 정치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와 맞물리는데 내가 그 사업의 1세대다. 책을 낸 뒤 대부분 정당에서 정치 관련 강의를 할 때 이 책을 많이 인용했다. 일부 정당에서 내 책을 출처라고 밝히지 않고 인용해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 책 제목과 최근 정치 이력과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총선 전적이 5전 2승 아닌가.
=. 다른 선거는 실패한 적이 없는데 내 선거는 여러 번 실패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부족해서 그런거다. 어찌보면 선거전략 책을 낸 뒤에 현실정치를 경험한 셈이다. 변명을 하자면 내 선거는 상대후보와의 경쟁이었다기보다 대선주자 혹은 대통령과의 경쟁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대 총선 때는 당 비상대책위원장 자격으로 3번 서구를 찾았고, 20대 총선 때는 대통령 자격으로 찾아왔다. 그가 방문할 때마다 선거판을 흔들렸다. 이학재 전 의원과의 싸움이라기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싸움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 만이 태양의 소중함을 알 수 있듯 선거에서 낙선해본 사람 만이 유권자들의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알 수 있다.
-. '1등 선거전략'에서 기억나거나 중요한 문구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 수도권 지역 선거에서 3가지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첫째는 중앙정치의 정세(정당 지지율), 둘째는 선거 구도, 셋째는 상대 후보의 역량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데 가장 좋은 선거전략은 자기만의 영역을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이나 이슈 등을 먼저 선점해야 선거를 이끌고 갈 수 있다.
-. 정계 진출은 어떻게 이뤄졌나.
=. 정치 컨설팅할 때 시민운동도 같이 했다. 겨레사랑운동실천연합이라는 단체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故 조철구 국회의원을 만났다. 난 조 의원보다 조 박사님이라는 호칭이 더 편했다. 1992년 14대 총선때 조 박사가 민주당 후보로 인천 서구에 공천을 받았는데 그때 도와달라고 해 캠프에 합류했다. 그땐 선거 2달 전에 지역에 부랴부랴 내려온 거였다. 후보가 집을 못구해 쩔쩔맸는데 마침 서구에 살던 신계륜 전 국회의원(63)이 서울 성북구로 출마한다며 살던 집을 전세를 내놔서 그 집을 계약했다. 가좌4동 한마음아파트였다.
14대 총선에 낙선한 뒤 4년간 조 박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도왔다. 15대 총선에서 당선돼 정책비서관으로 채용됐는데 조 박사가 큰 병에 걸렸다. 1996년 4월에 당선돼 같은 해 12월30일 별세했다. 제대로 의정활동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조 전 의원과의 일화가 있으면 알려달라.
=. 조 박사는 나의 인생과 정치에 있어 스승이다. 여기 지역사무실 벽 한쪽에도 그의 사진이 있다. 조 박사는 장준하 선생 사망 후 검안의로써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이다. 그때가 유신독재 시절이었는데 조 박사가 장 선생 시신 검안하기 전에 가족에게 유서를 남겼다고 하더라. 장 선생 시신을 검안한 이후 정권의 입맛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두렵지만 진실을 밝히겠다고 썼다고 한다.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 박사가 당선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 김대중 대통령(이하 DJ)을 만났다. 당시 DJ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는데 조 박사가 의원직 사퇴를 알리기 위해 찾아갔던 거다. 그 자리에서 조 박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의정활동을 하는데 지금 이 몸으로는 어렵다며 의원 사퇴를 하겠다고 말했다. DJ는 내년 대선에 당선되면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조 박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며 사퇴서를 반려했다. 의식있는 정치인을 떠나보내기 싫었던 거다. 그날 DJ와 조 박사가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조 박사는 DJ를 만난 뒤 내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만약 조 박사가 병을 이겨내고 살았다면 서구가 지금보다 더 활기찬 곳이 됐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헌신할 줄 알았고 옳은 일에는 모든 것을 던지는 성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의롭고 결기가 있는, 게다가 따뜻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나의 공천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났다는 것도 감사했다. 그 유언이 힘이 됐다. "정치는 국민의 눈에 흐르는 고통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스승님의 뜻을 이어받아 정치적 고향인 서구에 평생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그 때였다. 이번 선거 때도 조 박사 묘소를 찾아 마음을 다잡았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높은 요즘 정치가 무엇인지 되새겼다.
-. 정세균 국무총리와도 매우 가깝다. 그와의 인연도 소개해달라.
=. 1990년대 중반 나와 가까운 친구가 야학을 했다. 그 야학을 통해 정 총리를 처음 만났다. 그 친구의 고향 선배였다. 아직 그가 정계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당시 그는 쌍용그룹 계열사인 진방철강의 상무였다. 그때부터 만나서 서로 얘기했고 정치 발전과 역사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웠다.
정 총리는 진정성있고 정직한 사람이다. 겸손하고 균형감각도 뛰어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장점을 가졌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이러한 덕목을 지금도 많이 배운다. 백봉신사상(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추천해 모범적인 국회의원에게 주는 상)도 여러 차례 받지 않았나.
정 총리와는 일할 기회가 많았다. 정 총리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시절 난 수석 사무부총장을 맡은 것을 시작해 최근에는 그가 국회의장으로 있는 동안 사무총장을 맡았다. 옆에서 본 정 총리는 매우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지만 속은 매우 단단했다. 외유내강의 표본과 같다고 할까. 정치적 선배이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 30년 가까운 정치 활동을 하면서 많은 위기가 있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 보기와는 다르게 감정이 풍부한 편이다. 가을이 되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조 박사나 정 총리 같은 좋은 선배와 스승의 가르침이 버팀목이 되지만 때때로 부모님 산소에 다녀온다. 이번 선거 때도 2번 혼자 차를 몰고 다녀왔다. 8살까지 경기도 여주의 시골에 살았다. 부모님 산소도 그곳에 있다. 산소에 들린 뒤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어렸을 땐 그 학교의 철봉이 너무 높았는데 지금은 내 키보다 작다. 그 철봉 아래에 걸터 앉아 많은 생각을 한다. 교정도 몇 바퀴 돌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뭔가 버텨낼 에너지가 생기더라. 나만의 위기 극복 방법이다.
-. 김교흥 의원의 1호 발의 법안이 궁금하다. 있다면 지역구 관련 법안과 비지역구 법안으로 나눠 말해달라.
=. 지역구 관련 법안으로는 유료도로법 개정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중구 영종도와 서구 청라국제도시를 잇는 제3연륙교 건설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다. 이법을 개정해 제3연륙교 통행료를 인천·영종대교의 손실보전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자 한다.
2017년 인천시가 제3연륙교 손실보전금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2020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2025년에 개통한다고 발표했는데 진행이 더디다. 시가 손실보전금을 연륙교 통행료 수입으로 충당하려 했지만 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려 한다.
비지역구 법안으로는 부가가치세법 개정안을 발의하려 한다. 1970년대에 도입된 고속버스에 부가가치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을 생각이다. 고속버스가 도입당시에는 고급 교통수단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지금은 직행버스나 철도 새마을호는 부가가치세가 없다. 택시 역시 감면하고 있는 추세다. 비슷한 교통수단이 모두 부가가치세를 감면받고 있는데 유독 고속버스에만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이 법이 개정되면 고속버스 운임이 줄고 교통 혼잡도 개선될거라고 기대한다.
-. 마지막으로 등원에 앞서 지역구민과 국민들에게 밝히고 싶은 포부나 각오가 있으면 말해달라.
=. 이번 선거 개표방송 때 '당선 확실'이라는 말이 뜨니까 지지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나도 좋았다. 그러나 들뜨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정말 내 모든 걸 던져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주민들이 나의 진정성을 받아 준 것 같아 감사했지만 동시에 내가 주민들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40여개나 되는 지역 현안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걱정됐다. 걱정과 책임감이 앞섰다. 정말 그랬다.
그럴 즈음 조광한 경기 남양주시장이 선물을 보내왔다. 한문이 적힌 액자인데 총욕불경(寵辱不驚)이라고 적혀 있었다.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해와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의미다. 의정활동을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시장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본거다. 이 글귀를 내 집무책상 옆에 걸어뒀다. 매일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선거기간 내내 유권자들에게 일 잘하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바르고 일 잘하는 의정활동을 하겠다. 그동안 답보됐던 여러 지역 현안에 눈물을 흘린 주민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다. 제대로 일하겠다. 지켜봐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