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길었던 밤이 점점 짧아지며, 벚꽃잎이 흩날리는 '봄'. 신예 밴드 루시(LUCY)는 데뷔 싱글 '디어'(DEAR.)의 타이틀곡 '개화'(Flowering)로 봄을 노래한다. 두근거리는 정서를 담아낸 바이올린 소리에 청량한 보컬이 더해진 '개화'는 밝고 경쾌하면서도 왠지 모를 아련함이 묻어 있다.
루시는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방송한 JTBC '슈퍼밴드'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슈퍼밴드'에서부터 호흡을 맞췄던 바이올리니스트 신예찬, 베이스 겸 프로듀서 조원상, 드럼 겸 보컬 신광일에 새로 합류한 보컬 최상엽까지 4인으로 구성된 밴드다. '슈퍼밴드' 출연 당시 함께했던 보컬 이주혁은 원래 있던 밴드 기프트로 돌아갔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미스틱스토리 건물에서 밴드 루시의 인터뷰가 이뤄졌다. 추운 겨울이 지나 꽃이 피는 시기를 알리는 따뜻함을 담은 '개화'란 노래처럼, 꽃봉오리를 피우려는 출발선에 선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슈퍼밴드'에서 출발한 루시, 최상엽의 합류로 완전체가 되다
루시는 JTBC '슈퍼밴드' 출신이다. 당시 보컬을 맡았던 이주혁이 팀에서 빠졌고, 루시는 멤버 교체라는 변수를 맞았다. 자칫 잘못하면 팀이 유지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신예찬은 "그 당시에는 '루시가 없어질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팬분들이 많이 응원해 주시고 '언제 나와요?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말을 많이 해 주셔서 힘이 됐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최상엽도 '슈퍼밴드'에 출전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한 후에는 방송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루시 쪽에서 연락이 왔을 때, 노래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노래가 진짜 너무 좋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최상엽은 "(루시의) 음악색이 뚜렷한데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했다. 멤버들이 너무 잘해줘서 그거에 대한 부담은 (지금은) 없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공연을 코앞에 둔 촉박한 상황에서 치렀던 '톱3' 콘서트는 어땠을까. 신광일은 "상엽이 형하고는 처음 공연해 봤기 때문에 첫 번째 공연에선 엄청 많이 떨렸다. 저희 팬분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기대도 많이 됐다. 첫 번째 공연 때부터 노래하다가 울컥하고 드럼 치면서도 막 울컥해서 박자를 놓친 적이 있다"라며 웃었다.
신예찬은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 뭐랄까. 너무 확 지난 것 같다. 그 순간을 스스로 되게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많이 떨고 있었다. 그 시간을, 1분 1초를 제대로 못 짚고 간 게 있다. 좀 더 짚고 갈 걸…"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루시 멤버들은 최상엽이 합류하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아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청량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그의 보컬 덕이다. 조원상은 "상엽이 형 보컬이 엄청 많이 늘었다"라고, 신예찬은 "'루시화'(化)를 많이 해 줬다"라고 설명했다.
루시에 합류하면서 본인의 보컬 스타일도 달라졌는지 묻자, 최상엽은 "그전에는 되게 세세한 부분, 단어, 음절 하나하나에 신경 썼는데 이제는 음악 전체를 보게 된 것 같다. 나무만 봤다면 숲을 보게 되는 능력을 갖게 된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전에 '뱉는' 소리를 냈다면 지금은 소리를 '머금어' 좀 더 위쪽에서 낼 수 있게 됐다고.
루시라는 팀명은 의외의 곳에서 시작됐다. 조원상의 작업실에 있던 강아지 이름에서 따왔다. 조원상은 "저희가 루시도 아니고 뭐도 아니었을 때, 팬들이 '비글즈'라고 많이들 불러주셨다. 저희가 맨날 뛰어놀고 하는 모습이 비글 같다고 해서. 강아지는 귀여운 이미지도 있지만 친근한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라면서 "또, 편견 같은 걸 깨고 싶은 성향이 있는 팀이기도 하다. 남자팀이지만 여자 이름을 쓰는 게 그래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라고 밝혔다.
강아지 이름에서 출발한 루시. 팬클럽 이름도 범상치 않다. 바로 '왈왈이'다. 루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커뮤니티에서 '왈왈'이라는 말을 인사로 썼는데, 그게 확장하다 보니 서로를 '왈왈이들'이라고 부르게 됐단다.
루시라는 팀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조원상은 "저희는 앰비언스 사운드도 많이 활용하고, 바이올린이 들어가다 보니까 어떤 장르든 신선하게 다 저희 색깔로 만들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돌도 아니고 중후한 느낌도 아닌, 중간 지점에 있달까"라고 말했다.
앰비언스 사운드는 주변 환경의 소리를 말한다. '선잠'에서는 버스 문 여닫는 소리, 삐-삐- 하고 울리는 자명종 소리 등이 나오며, '플레어'(Flare)에서는 불꽃놀이 할 때 쓰이는 폭죽 소리가 등장한다. '스튜디오 음악당'에서 선보인 '크라이 버드'(Cry Bird)에는 정글을 연상케 하는 흥겨운 소리가 들어갔다.
루시는 앞으로도 '필요하면' 곡에 앰비언스 사운드를 넣을 예정이다. 소리를 채집하는 것도, 이를 곡 안에 잘 녹이는 것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데,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지 물었다. 조원상은 "다들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곡을 만들 때 어떤 '완성체'로서의 영상을 생각한다. 어떤 환경이고 온도인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어떤 시간이고 날씨인지… (거기에 어울릴) BGM을 생각하고 음악을 만든다. 앰비언스 사운드도 (제 머릿속) 영상에서 나오는 걸 삽입한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차별화 포인트는 바이올린이 주요 악기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데뷔 싱글 '디어'에 수록곡 '인트로'(INTRO)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바이올린 선율이며, 타이틀곡 '개화'의 문을 여는 것 역시 바이올린 몫이다.
신예찬은 "원래 바이올린 리프로 시작하는 걸 하고 싶었다. 원상이가 한 번 들어봐 달라고 했는데 너무 알맞게 만들었더라. 지인들한테도 다 들려줬는데 너무 좋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조원상은 "(다른 분들 노래를 듣고) 완성도가 정말 높아서 질투한 적이 있었다. '개화'를 처음 썼을 때 '아, 내가 썼는데도 이 곡이 내 곡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감이 되게 높았다"라고 밝혔다.
신광일은 "다 만들고 마스터링까지 하고 난 다음에 이어폰으로 완곡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실감이 났다. 이게 '루시'라는 이름으로 나오겠구나, 많은 음원 사이트에 나오겠구나 하고"라고, 최상엽은 "너무 좋았다. 그전까지는 시도해 보지 않은 장르여서 되게 새로웠던 것 같다"라고 당시 소감을 전했다.
원래 3월 중순에서 4월 즈음 데뷔 싱글을 내려고 했던 루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시점을 늦췄다. '개화'는 봄 버전의 '난로'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탄생한 곡이다. '난로'는 루시가 엠넷 '스튜디오 음악당'에서 공개한 미발매곡이다. 조원상은 "'개화'도 '난로'만큼이나 웅장하고 스케일 큰 곡으로 나오게 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어떤 장르냐고 묻자, 그는 "굳이 따지자면 포크송일 텐데 장르를 딱 정하고 싶진 않다. 앞으로 쓰게 될 곡들도 장르를 명시하진 못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루시는 인터뷰 하루 전인 지난 18일 공식 유튜브에 '개화' 수어 버전 영상을 올린 바 있다. 조원상은 "저희 '개화' 곡 내용 자체가 희망을 주는 건데, 그 대상은 불특정 다수다.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분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싶어서, 그분들의 언어로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