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이제는 대화의 시작이 부동산이나 다름없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자가(自家)야?"라고 묻는 것은 실례를 범하는 것'이란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떳떳이 공개하고 부동산 정보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씨도 어느덧 부동산 얘기를 주도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처음에는 계속되는 부동산 얘기에 모임을 나가는 것에 피로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가 화제를 부동산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 부동산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도 있지만 친구,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밀리지 않으려는 이유도 녹아있다.
이씨는 "사람들과 부동산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 내가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내 정보가 아직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라며 "부동산 공부를 하는 이유는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목적이 가장 크지만 이러한 정보를 모르면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하거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라고 밝혔다.
이씨의 경우처럼 이제는 일상적인 대화의 주제가 된 부동산. '그야말로 기·승·전·부동산'인 시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정부의 부동산 규제 여파로 인해 시장 거래가 급감하면서 부동산중개업소가 타격을 받았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따르면 지난 3월 개업한 공인중개사 수는 전달보다 20% 감소한 1516명이다. 3월 기준으로는 1999년(1144명) 이후 21년 만에 가장 적은 수치다. 폐업은 1181건으로 부동산 경기가 최악이던 지난해 2월(폐업 1214건)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이 이렇지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려는 인구는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젊은층의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20대의 응시자의 경우 2015년 1만 4천명 가량에서 2019년 2만 469명으로 증가했다. 전체 응시자 역시 2014년 12만 890명에서 2018년 21만 8614명으로 4년새 약 2배 가까이 늘었다.
과거에는 자격증을 획득해 취업과 은퇴 후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현재는 부동산의 흐름을 읽고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내집을 마련하거나 투자를 하기 위함이다.
퇴근 이후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는 직장인 김모(34)씨는 "일단 자격증을 획득하면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부동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나중에 주택 매매나 투자에 남들보다 유리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더 크나, 사실상 지금의 공부는 나만의 재테크 수단이다"라고 설명했다.
대출을 받아 다주택자가 되는 게 '투기꾼'이 아닌 능력있는 투자자로 인식된 지 오래다.
부동산에 슬퍼하고, 꿈을 꾸는 시대다. 설문조사 플랫폼 나우앤서베이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당신을 가장 슬프게 한 이슈' 1위가 부동산 가격 상승·부의 양극화 심화(15.7%)였다. 사회적 이슈였던 취업난(13.2%)과 묻지마 범죄 공포(10.8%)를 넘어서면서 국민들이 얼마나 부동산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20년 가장 이루고 싶은 소망 역시 내 집 마련(17%)으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신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 다이어트(12.7%)를 넘은 것은 물론 취직·이직(14%)도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넘어서지 못했다.
올해는 꼭 내 집을 갖겠다는 목표는 또다른 지표에도 드러난다. 부동산 플랫폼 회사인 '직방'이 주택 매입 여부에 대한 주제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980명 가운데 71.2%인 3547명이 올해 주택을 매입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의 청약통장 가입현황을 보면 올해 4월말 기준 전국 청약통장(주택청약종합저축·청약저축·청약예금·부금) 가입자 수는 2604만 9813명으로 국민 절반이 청약 통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20대 가입자가 30~40대를 앞지르면서 점차 부동산 대해 관심을 두는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0세 미만 영유아 가입자가 181만명을 넘어서면서 부동산으로 고민을 겪고 있는 이들의 부모 세대가 자식들을 위해 일찌감치 부동산 매입 준비에 돌입했다.
이처럼 청약에 몰리는 이유는 당첨만 된다면 '로또'나 다름없다고 불릴 정도로 아파트로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성수동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경우 취소 물량 3채를 추가 분양했는데 무려 26만 5천명이 몰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첨만 된다면 크게 10억원 정도의 시세차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이 아파트에 청약을 넣었다는 심모(31·여)씨는 "사실 월급만 바라보는 직장인들은 청약이 아니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너무 어렵다. 당첨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넣었다"라며 "당첨 발표일까지만이라도 기대에 부푼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계속 높아지면서 집은 '사는(live)' 곳이 아니라 '사는(buy)' 곳이라는 인식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 부동산은 부자든 서민이든 중산층이든 모두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그리고 자식을 위해 열망하는 그런 존재가 됐다.
글 싣는 순서 |
①기·승·전·부동산'…둘만 모여도 아파트 얘기(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