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는 해당 법안들의 규정이 모호해 악용 가능성이 있고, 해외 사업자는 법망을 빠져나갈 여지가 있어 결국 국내 사업자만 옥죈다고 반발하고 있다. 더구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20대 국회가 졸속 입법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 목소리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 스타트업·시민단체 "'n번방 방지법' 졸속추진 말라"
1300여개 스타트업 모임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민생경제연구소, 사단법인 오픈넷, 소비자시민모임, 참여연대, 한국소비자연맹 등 시민단체는 1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에 소위 'n번방 방지법'의 졸속 추진을 중단하라는 공동의견서를 전달했다. 앞서 해당 법안은 지난 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은 의견서에서 "방송통신 3법(전기통신사업법, 정보통신망법, 방송통신발전기본법)이 민간 사업자에 사적 검열과 관련한 과도한 의무를 부과해 사업자의 피해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회가) 충분한 공론화와 업계 의견 수렴 없이 입법을 진행 중"이라며 "20대 국회 임기 내에 무리하게 추진하지 말고 21대 국회로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법제사법위원회 등 국회 일정을 앞두고 재차 압박에 나선 것이다.
해당 법안은 방송통신발전기본법, 전기통신사업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으로 각각 '데이터센터 규제법', '넷플릭스법',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린다.
데이터센터 규제법은 방송통신재난관리기본계획에 민간의 데이터센터(IDC)를 포함,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IDC가 작동하지 않아 데이터가 소실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발의됐다.
넷플릭스법은 고화질 동영상 트래픽 급증으로 인한 망 품질 유지 부담을 콘텐트 사업자에게 부과하는 내용이다.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인터넷 기업들에게 디지털 성범죄물 등 불법촬영물 유통방지 조치 의무를 부과하고, 이런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최대 관련 매출의 3%를 과징금으로 부과한다.
◇ "포괄적 법안, 검열 위험만 높여"… "망품질, 통신사 의무인데 부담은 왜 스타트업이?"
인터넷 업계는 불법영상물 유통 근절이라는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기업 재산권을 부정하고 사적 검열을 조장하는 법", "구글·넷플릭스·텔레그램 등 해외 사업자에겐 집행력이 부족한 법"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공동의견서에서 "해당 법안은 대기업인 이동통신 회사 이익에는 크게 부합하고, 다수의 인터넷 기업과 스타트업, 소비자 편익은 침해한다"면서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는데도 규제 정도나 부작용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현재도 신고나 요청을 통해 불법촬영물을 인지하면 기업들이 곧바로 삭제하고 있는데, 과도하게 포괄적인 법안 탓에 기업이 이용자의 통신비밀을 침해할 소지를 높인다는 게 업계의 가장 큰 우려다.
더구나 어떤 인터넷 기업에게 이런 의무를 지울 것인지, 또 기업이 해야 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는 무엇인지 등 법안의 중요한 내용이 모두 시행령에 포괄적으로 위임하고 있어 제도의 예측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인터넷 기업 관계자는 "법안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카카오톡이나 밴드 등 사적인 대화방 등을 무작위로 검열할 수 없다는 점을 시행령이 아닌 법안으로 분명히 해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시행령은 법안보다 쉽게 정부가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정권에 따라 불법촬영물 감시 등의 명목으로 이용자 사생활 침해가 가능하도록 규제가 바뀔 위험이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인터넷 기업에 통신서비스 안정화 책임을 부과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이른바 '넷플릭스법'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인터넷 업계의 주장이다.
인터넷 망 품질은 통신사 본연의 의무인데 이를 콘텐츠기업(CP)에 부과하게 하면서 스타트업을 포함한 모든 CP에게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다. 어떤 기업에게 어느 정도 의무를 지울지 등도 정해지지 않았다. 시행령에서 구체화될 예정이다.
법 집행력이 없는 해외사업자 대신 국내 사업자만 의무를 질 것이라는 우려는 n번방 방지법과 넷플릭스법에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우려다. 이번에 해외 기업들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역외규정'이 신설되긴 했지만 이런 규정만으로 해외 기업에 대한 규제 실효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오픈넷은 "방통위가 n번방 방지법이 비공개 대화방에는 적용되지 않아 불법 촬영물 유통을 방지하겠다는 의도가 무색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넷플릭스법과 관련해선 해외 기업에 국내법의 집행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국내 소비자들이 국내 플랫폼에서 4K 등 고품질 동영상을 보기 어렵게 하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 정부‧여당 "업계 우려, 시행령 논의과정에서 불식"
인터넷 규제 3법이 모호한 내용으로 인한 악용 가능성, 역차별 가능성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시행령 논의과정에서 이런 우려를 충분히 반영할 것"이라며 업계의 우려가 과도하다고 일축했다.
더불어민주당 안정상 방송정보통신 수석전문위원은 "개정법률안 어디에도 인기협 등이 우려하는 '사적 검열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만한 근거가 되는 규정은 없다"며 "(업계의) 우려는 (법안이 미칠 영향을) 자의적으로 '침소봉대'식으로 해석하고, 근거 없는 선입견만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만 역외규정의 한계는 인정했다. 안 수석전문위원은 "물론 역외규정 신설만으로 완전한 법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면서도 "그동안 이 규정마저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해외 사업자에 대해 불법정보 유통에 대한 법적 조치를 할 수가 없고, 역외규정 적용으로 규제기관은 좀 더 적극적으로 불법정보 유통에 대한 법적 조치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업계의 반발에 대해 "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된다면 중복규제와 역차별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행령 입안 과정에서 관련 업계 등과 충분히 협의해 나갈 것"이라며 모호한 규정도 시행령 논의 과정에서 업계 의견을 반영해 구체화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 업계 "졸속 입법 반대…21대 국회서 충분한 공론화 거쳐 추진하라"
이들 단체는 "국회와 정부가 n번방 법안을 앞세워 대형 이통사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인터넷사업자들에게는 과도한 의무와 책임을, 소비자들에게는 가계통신비 인상 부담을 지우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다수 국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중요한 법안을 20대 국회 종료 시한에 맞춰 '졸속 추진'하려 하지 말고 21대 국회에서 충분한 공론화를 거쳐 추진하라"고 촉구했다.
앞서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인터넷기업협회 등은 지난 12일에도 '쟁점법안 졸속처리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최성진 코스포 대표는 "정부와 국회는 통신사 망 비용의 정확한 실태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통신사가 제출한 데이터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국회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의 역차별을 해소하려 했다면 네트워크 시장을 감시하는 법안을 강화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은 이날 여야 원내대표단에 긴급 면담요청서를 전달했다.
면담 요청에 대한 회신이 없을 경우 국회 본회의 하루 전인 19일 면담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 원내대표실을 방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