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은 첫 번째 순서로 군 부대 내에서 대검으로 양민을 학살한 군 진술 등 추가로 확인된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 보도한다.
◇국방부 5·18진상조사위 설립준비단 연구용역
국방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타임라인과 관련한 선행조사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이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 출범을 앞두고 5·18조사위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사전에 쟁점을 정리하고 향후 조사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광주CBS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5·18조사위로부터 연구용역의 결과보고서를 단독 입수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1980년 5·18 당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시민을 그것도 군 부대 안에서 대검으로 무참히 살해한 사실이 군 관계자의 증언과 문서로 확인된 것이다.
지난 2006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18 당시 군인들에 대한 면담보고서에 이러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였던 백남이 대령은 "1980년 5월 21일 전교사 사령부 운동장 광장에서 젊은이 하나를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면서 "이 상황은 김순현 전투발전본부장 등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11특전여단 62연대 본부 중대장이었던 이인권씨는 "오인사격 현장으로 상황파악을 하러 갔다 오니 거적에 덮인 시체 1구가 보였다"면서 "병사들에게 물으니 4지역대 중사가 체포해 온 시위대 1명을 대검으로 목을 찔러 죽였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중요한 진술들이 5·18 40주년이 된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 묻혀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진상조사가 발포명령과 암매장 등을 주로 다뤘기 때문이다. 민간인 학살 부분은 조사가 이뤄졌더라도 공론화 되지 못했던 것이다.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한 잔혹한 양민학살은 1996년 검찰의 수사기록을 통해서도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5·18 당시 11특전여단 제4지역대장을 지낸 최규진씨는 서울중앙지검에서 한 진술에서 "대검은 개인휴대장비로 가지고 가 무력시위 때 착검을 하고 무력시위를 했다"면서 "시위대에 대한 사용에 대해서는 원 주둔지로 복귀해 들어보니 저의 62대대 4지역대 소속이었던 모 중사가 잡아온 시위대에게 대검을 사용해 시위대 1명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최씨는 "제가 중사에게 물어보니 시인을 해 제가 왜 그런 일을 했냐고 때린 일이 있는데 그 외 대검을 사용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고 진술한 내용이 검찰조사에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보면 현장의 계엄군들은 시위 상황과 무관하게 대검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대검 사용에 대한 통제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용역을 진행한 연구원들의 의견이다.
◇계엄군의 잔혹함 곳곳서 확인
계엄군의 광주 송암동 지도와 오인사격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일지에도 1980년 5월 24 오후 2시 시민 1명을 즉결 처분했다는 내용이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증언은 있었으나 실제 군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던 내용 중에 화순너릿재 터널 봉쇄 사건도 눈에 띈다. 터널 봉쇄를 위해 트럭을 터널 안으로 밀어 넣고 불을 지른 후 트럭운전사가 되돌아 나오는데 그 트럭 운전사를 향해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도 11특전여단의 전투상보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피해자들이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점을 보면 행방불명되거나 암매장됐을 가능성 등에 대한 추가 조사도 필요해 보인다.
◇전투기 출격 대기, 헬기 사격 증거도 추가 확인
이밖에 전투기 출격 대기 정황과 헬기 사격에 대한 증거도 추가로 발견됐다.
군 문서인 11특전여단 전투상보의 송암동 오인사격 상황도에는 '건십 2대 공중 엄호'로 기록돼 있다. 건십은 무장된 상태의 전투기를 뜻한다.
505보안부대 수사관을 지냈던 허장환씨의 과거 증언과 맞물려 5·18 당시 실제 전투기가 출격했거나 이러한 계획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역 행정기관과 의료기관에서 생산한 자료에서도 계엄군의 잔혹성을 입증할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일어난 장갑차에서의 계엄군 최초 발포는 그 피해자가 '김영찬'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와 전남대학교병원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부상자는 모두 6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의 발포가 일회성 총격이 아니라 다발성 총격을 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미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분배돼 있었거나 적어도 시내 일원에 투입됐던 장갑차에는 실탄이 탑재돼 있었던 것을 입증하고 있다. 실탄을 철저하게 통제했다는 계엄사의 발표 또한 허위라는 것이다.
계엄군의 잔혹함은 이뿐만 아니다. 지난 2018년 10월 정부합동조사반의 조사결과 17명의 성폭행 피해사례 외에도 대인동 공용터미널 부근의 '대인동 집창촌'에서 19일과 20일 밤 계엄군들이 여러 차례의 집단 성폭행과 금품을 탈취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출판된 녹두서점이라는 증언록에서도 5월 19일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시체 2구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추가됐다.
그동안 시위 상황에서 대검 사용 등 시민군 학살에 대한 증언과 문서는 있었지만 시위상황과 무관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연구용역을 진행한 허연식 책임연구원은 "지금까지 5·18과 관련된 조사는 발포명령과 암매장 등을 주로 다뤘기 때문에 이런 사안들에 파묻혀서 실제 디테일하고 훨씬 더 중요한 인명 살상이라든가 시위상황과 무관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면서 "그동안 생산된 많은 자료와 연구결과물 그리고 증언들을 5·18조사위 활동을 통해 교차 검증 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