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영 감독, '바람의 언덕' 통해 그가 마주한 것들

[노컷 인터뷰] 영화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영화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딸을 버린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품고자 하는 딸의 이야기다. 동시에 각자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외면하고 도망쳐 온 두려움을 태백의 바람과 함께 날려버리고 비로소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람의 언덕'이다.

'바람의 언덕'은 엄마가 되는 것이 두려워 새 삶을 찾아 나섰던 여자 영분(정은경)과 엄마가 지어준 이름처럼 씩씩하게 살며 외로움을 이겨내던 딸 한희(장선)의 서로 다른 인생이 교차하며 시작된다. 영화는 둘의 얼굴을 비추며 관객들이 그들의 감정에 깊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목처럼 바람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영분과 한희의 복잡하면서도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세월 동안 쌓인 상처 많은 내면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맴돌던 바람 소리는 영화의 마지막, 바람의 언덕에서 강하게 불어온다. 그곳에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바람의 언덕'은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 등 '꽃' 3부작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의 신작이다. 전작의 인물들은 버려지고 스스로 자립한 아이들이었다. 버린 사람과 버려진 사람의 만남, 용서와 화해를 그린 것은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석영 감독은 이번 작품을 '이상한 영화'라고 표현했다.

(사진=영화사 삼순 제공)
◇ 무작정 떠난 태백, 그곳에서 시작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 '바람의 언덕'

"이 영화를 찍은 후 다음 영화는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어머니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영화를 찍게 되면서 삶과 사람에 대해서 많이 겪고 배웠어요. 전작들도 마찬가지지만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나 기존의 가치관 등에서 조금 더 따스하게 한 발짝 나아가게 한 영화예요. 고마운 일이고, 고마운 영화죠."

박 감독은 '꽃' 시리즈를 마친 후 영화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마흔두 살에 첫 영화를 시작해 총 세 편을 연달아 찍었다. 기운이 다 빠진 느낌도 들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포기할까 고민하던 그를 붙든 것은 어머니였다.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어머니가 자기 또래의 사람들이 보기 쉬운 영화를 만들어보라며 2천만 원을 건넸다.

그 후 무작정 떠난 곳이 강원도 태백이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아무런 정보도, 가본 적도 없는 태백으로 떠났다. 낯선 도시를 여기저기 다니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나갔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마음에서 피어난 물음, 태백의 거리 그리고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말과 생각을 한데 모아 '바람의 언덕'을 만들어냈다.

"자립한 아이들이 잘 커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만난다면 이전 내 영화들과 맥락이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전 영화 속 모든 캐릭터에게는 자신을 버린 사람과 대면할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어릴 때 버려진 딸과 원치 않게 딸을 버린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고 영화를 시작했어요."

영화는 여느 드라마나 영화처럼 극적인 화해와 해피엔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엄마는 딸 한희에게 네가 밉다고, 억울하다고 온갖 가시 박힌 말을 던진다. 그런데도 한희는 괜찮다고, 그냥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만 한다. 그런 딸을 두고 떠난 듯 보인 영분은 바람의 언덕에서 한희와 재회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미처 꺼내지 못한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제야 둘은 비로소 환하게 웃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제 철학에서 보자면 둘이 만나는 장면은 거짓말 같은 거예요. 그런데 영분과 한희가 서로 무섭다고 말하더니 웃고, 숨을 크게 내쉬는데 이렇게는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분과 한희도 두려웠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서로 만난 거 같아요. 살아오며 견뎌내야 했던 삶의 무게에서 풀려나고 싶기도, 먼저 용서하며 자신을 짓눌러 온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거죠. 배우들도 영분과 한희의 인생을 살며 그렇게 이해했다고 하더라고요. 인물들이 바라던 모습이기도 한 거죠."

(사진=영화사 삼순 제공)
◇ 두려움을 마주하고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

자신을 버린 엄마를 용서하는 게 한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기쁘게 웃으며 살라는 의미가 담긴 '한희'. 이름 그대로 살기 위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외로움, 분노, 슬픔, 긴장 등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걸 애써 참고 견디며 숨 가쁘게 살아야 했기 때문인지 한희는 천식을 앓고 종종 호흡곤란을 겪는다. 그런데도 엄마 때문이 아니라 그냥 가끔 숨이 찬 것뿐이라고 말한다.

"한희는 놀라울 정도로 선한 캐릭터예요. 선함으로 악함을 이기는 사람이죠. 악한 사람 없이도 인생은 충분히 지옥 같을 수 있죠. 그러나 사람에게는 괴롭고 처참한 삶만큼이나 누군가를 용서하고 감싸주려는 마음도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해요. 드라마라는 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조차도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렇기에 저는 한국 영화에 선한 인물이 조금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돌아서서 떠난 영분과 한희가 다시 재회한 것은 한희의 노력과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를 보면 마지막을 위해 달려온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응축돼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어쩌면 엄마와 딸의 만남이라기보다 각자의 세월을 산 두 사람이 각자 지닌 두려움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

박 감독은 "지나고 보니 나의 것, 어머니의 것, 배우들의 것 등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꽃' 3부작의 인물들은 마주하지 못하고 항상 떠돌았다. '바람의 언덕'에서 만남과 용서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감독도 자신 안에 담긴 사람과 관계, 영화, 그리고 자신에 관한 두려움을 직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님과 여성을 통해서 저 역시 제 안에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마주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무 가둬놓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다, 결벽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겠구나, 더 마음을 풀고 더 깊게 상상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이해해 줄 관객이 있을 테니까요."

영화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영화를 통해 이어지는 이야기, 이야기를 통해 얻은 용기

실제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공동체 상영) 방식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과 더 가까이, 깊게 만나 관객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마주했다. 저마다 영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며 누군가는 인간을, 시대를, 인생과 두려움을 만나기도 했다. 관객들의 이야기가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키워나갔다. 감독도 자신의 영화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저는 그냥 태백에 가서 어떤 사람을 상상하고, 내 인생과 배우들의 인생이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목격해 정리한 정도예요. 각자 인생에 담는 것은 저의 일이 아니라 관객분들의 몫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앞으로도 어떤 영화를 찍더라도 사람들과 마주하고 깊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게 본질적으로 시대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라 생각해요."

어머니의 산책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태백으로 이어졌다. 태백에서 온몸으로 맞은 바람이 감독 자신과 배우들은 물론 관객들의 마음에도 불어 어떤 새로운 '바람'(wish)이 됐다. 조금은 더 밝음과 여유를 알게 됐다. 용기를 얻었다. 그는 차기작에서 그동안 용기 내지 못해 차마 건들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박 감독은 자신처럼 '바람의 언덕'을 통해 많은 사람이 따뜻함과 용기를 안고 새로운 여정을 향해 한 발짝 내딛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마음이 스산한,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고 용서받고 싶은, 아니면 골방에서 나와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들, 화해하고 싶은 분들한테 영화가 가서 닿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사진=영화사 삼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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