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이 '성범죄'와 동급? n번방 본질 흐리기

[노컷 딥이슈] 팬덤 하위문화인 팬픽과 n번방 비교 움직임
성적 표현보다 '로맨스' 중심…아이돌 향한 관심과 애정 기반
여성 아이돌 그룹은 성범죄 해당하는 '딥페이크' 피해 시달려
"팬픽은 성착취·성구매 현실로 전환 안돼…n번방과는 다르다"
"'딥페이크'는 팬덤 문화도 아니고 범죄…팬픽과 비교 불가능"

(그래픽=안나경 기자)
미성년자·여성 대상의 성착취 범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n번방 사건 이후, 이 같은 성착취물을 공유하는 남성문화가 비판받자 일각에서 여성들 역시 남성들을 '성희롱'하고 있다며 '팬픽'(대중적 작품들을 대상으로 팬들이 자신의 뜻대로 비틀기하거나 재창작한 작품)에 n번방을 빗대고 나선 것이다.

한 언론사는 이런 주장을 기사에 담아 n번방과 남자 아이돌 그룹 대상의 '팬픽'이 닮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말 팬덤의 하위문화 중 하나인 '팬픽'은 n번방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일단 '팬픽'의 수위는 창작물에 따라 제각각이다. 대다수 아이돌 그룹 내 멤버들 간의 로맨스를 그리지만 그 형태가 반드시 성적인 표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팬들이 이입하기 좋은 가상의 주인공과 아이돌 그룹 멤버 간의 로맨스를 그리기도 한다.

그 대상이 남자 아이돌 그룹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며, 주류라고 보긴 어려워도 여자 아이돌 그룹이 주인공인 팬픽도 있다. 이 모든 창작물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광범위한 '로맨스'가 전개된다는 것밖에 없다.

팬픽은 어디까지나 '재창작물'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실제' 아이돌 멤버 그 자체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름과 이미지를 차용해 올 뿐, 사실상 그 안에서는 팬들의 상상을 입힌 전혀 다른 캐릭터로 뒤바뀐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다양하게 창작되는 '팬픽'의 속성을 성희롱으로 한정짓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성적 표현이 담겨 있다고 해도 이를 n번방과 동일선상에 놓기에는 현실적 측면에서 다소 무리가 따른다.

아이돌 그룹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기반인 팬픽과 성산업으로까지 진화한 디지털성범죄는 그 탄생부터 결과까지 같은 무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택광 문화평론가는 24일 CBS노컷뉴스에 "팬픽은 허구 공간에서 발생하는 창작물로 그것이 성착취 '현실'로 전환되지 않으며 '성구매'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n번방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주빈 등 운영자들이 성범죄를 기반으로 비인간적인 성착취물을 제작해 이를 죄책감 없는 구매자들에게 팔았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거대한 성산업이고 그 시장이 실제로 형성됐다는 게 심각한 일"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굳이 n번방까지 가지 않더라도 남성 아이돌 그룹과 여성 아이돌 그룹의 소비 방식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여성팬들이 '팬픽'을 주로 즐긴다면 소수 남성팬들 혹은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는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포르노가 소비된다. 여성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들도 표적이 된다.

성적 표현이 전부가 아닌 팬픽과 다르게 이는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성범죄'에 해당한다. 지난달 국회에서는 딥페이크 포르노를 제작하거나 퍼뜨리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딥페이크 처벌법(성폭력범죄처벌 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팬픽이 여성 팬덤 내에서 더 활성화된 것은 한국 내 여성 팬덤 문화가 남성보다 더 오래됐기 때문"이라며 "최근에는 문학적 표현의 자유가 엄격해짐에 따라 그 논의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성적 대상화와 팬픽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논의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특히 여성 아이돌 멤버들이 겪는 '딥페이크' 문제는 팬들의 문화 자체가 아니라 그냥 범죄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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