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모성 배반→처벌… 韓 영화가 답습한 여성 캐릭터들
② 식모·호스티스→전문직… 韓 영화 속 여성의 직업 변천사
③ 1970년대 영화에 여성 간첩 서사가 계속 나온 이유
④ '사적'(史的) 다큐로 재탄생, 여성 감독 다큐의 가능성
⑤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 '여성영화'란 과연 무엇일까? <끝>
손 씨는 "지난 5년간의 대중 강연에서, 또 15년 동안 글을 쓸 때 늘 천착해왔던 것은 이것이었다. '스크린에서, 여성은 어떻게 (상징적으로) 소멸되어 왔는가?'"라며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과거-현재를 개괄했다.
손 씨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한국영화 속 여성은 자주 '장애 있는 몸'으로 그려졌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꽃잎'(1996)의 소녀(이정현 분)다. 손 씨는 "80년 광주를 다룬 작품인데 민주주의의 실패와 민족적 비극이 장애 있는 여성으로 표현된다"라며 "이는 (여성이) 상징적으로 소멸한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선상에 있는 캐릭터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의 옥이(심혜진 분), '웰컴 투 동막골'(2005)의 여일(강혜정 분)을 들었다.
1990년대는 '기획 영화'를 만들며 이른바 충무로 시스템을 닦은 여성 영화인들과 최진실, 심혜진, 강수연 등 걸출한 여성 배우가 만나 새로운 장을 여는 시기였다. 손 씨는 이 시기 여성 캐릭터가 희생적인 방식으로 가정에만 함몰되지 않으면서 자아실현을 우선시하고, 일과 사랑 전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곧 IMF 경제 위기를 맞으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손 씨는 당대를 풍미한 유행어 '아빠 힘내세요', '부자 되세요'를 거론하며 "재난을 남성의 몫으로만 상상하는 이야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럼 여성은 어디에 있을까? 신(新) 현모양처가 됐다. 90년대 말에도 (권장되는) 여성상은 현모양처였지만 조금 다르게 새로워야 했다. '돈도 버는' 슈퍼우먼을 원한 것이다. 여성은 집안일에 더해 바깥일에도 능해야 했고, 그녀의 경제적 능력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곧 소비자 권리로만 이어지는 흐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처지는 더 곤란해졌다. 손 씨는 영화 안에서 끝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이영애 분),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 분)의 딸이라는 걸 유일하게 알지 못하는 캐릭터 미도(강혜정 분)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진실로부터 여성이 계속 소외되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덧붙였다. '악마를 보았다'(2010), '브이아이피'(2017)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손 씨는 "그야말로 맞고 죽고 사라지는 (여성의) 신체로만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럼 미치거나, 죽거나, 장애를 가지거나, 사라지는 여성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과연 없는 걸까. 손 씨는 "감독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작품들을 한데 묶으려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특정한 시대적 상황 안에서 느슨한 경향성을 공유하는 작품이 있고, 그것을 한국 여성영화의 새로운 물결(NEW WAVE)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전고운 감독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2008)는 모범생인 여자 고등학생이 고시원에서 연인과 성관계를 하다가, 옆방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이야기다. '소공녀'(2018)는 위스키와 담배라는 자신의 기호를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하는 여성에 대한 영화이다. 손 씨는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성폭력 장면을 시각적 쾌락으로 다루지 않고, 성폭력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라는 점에서 다르"며 "남성 감독이 그리는 성관계에 대한 환상, 어떤 사람이 성폭행당하는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어떤 행위에 성별화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의미를 비워내거나 해체하는 것"이 전 감독의 '여성영화'라고 전했다.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2004)은 사장의 지시로 장부를 조작하는 업무를 맡은 두 여성 직장인을, '비밀은 없다'(2016)는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딸이 사라져 혼란스러워하는 부부에게 카메라를 댄다. 손 씨는 "이 감독 작품 주인공은 다 여자이지만 여성혐오적인 면도 있다. 이상한 구석이 있다. 뭐에 몰두해 있거나 왕따이거나 기기묘묘한데, 그렇기에 더 여성영화로 읽힌다. 이 감독에게 여성은 '보편 인간'이므로,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 '성별 정형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라고 짚었다.
손 씨는 또한 차성덕 감독의 '사라진 밤'(2011)과 '영주'(2018)에 관해 "카메라는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을 포착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라고, 정주리 감독의 '11'(2008)과 '도희야'(2014)를 두고는 "주변인이라는 위치로 인해 서로 손잡는 여성들을 비춘다"라고 말했다.
'여성영화'란 무엇인지 고민이 됐다는 손 씨는 "정답으로서의 여성영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맥락으로서 등장하는데, (여성영화라는) 개념을 공유하는 느슨한 경향성이 있다"라고 진단했다. 우선 그는 '우리들', '리틀 포레스트'(2017), '어른도감'(2018), '영주', '미쓰백'(2018), '우리집'(2019), '보희와 녹양'(2019), '밤의 문이 열린다'(2019), '벌새'(2019) 등은 일종의 성장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전했다.
'자전적 성격'과 '작가의 등장'도 중요한 키워드다. 손 씨는 이경미, 윤가은 감독의 '자전'으로 각각 '기이한 판타지를 여는 것', '기어이 마음을 포착하는 방식'을 든 후, "여성이 자신의 시간을 들여, 사소한 것을 '감히' 질문하며 재현해내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의 작품이 누적돼야 작가 탄생도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손 씨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감독이 작품을 쌓아서 관객이 작가의 인장(시그니처)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여성 감독이 작가로 호명되지 못한 건 여러 작품을 쌓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라며 "'이경미 월드', 윤가은 유니버스'라는 말은 팬덤의 유희인 동시에, 여성 감독의 이야기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밝혔다.